서울 셋방살이는 조선시대에도 힘들어, 선비 황윤석이 첩 두려고 한 까닭은

▲ 서울 셋방살이는 조선시대에도 힘들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매물은 줄어들고 월세는 높아지는 이중고 속에서 서울지역 세입자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서울 셋방살이의 어려움은 현대인만이 겪던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도 셋방살이의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죽하면 집주인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고매한 선비가 대안으로 첩을 마련해 함께 살 궁리를 할 정도였을까.

23일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월세 매물은 20일 기준으로 1년 전인 2023년 6월20일보다 20.2% 감소했다.

은평구 매물이 773건에서 196건으로 74.7% 감소한 가운데 동대문구, 중구, 노원구 등이 뒤를 이었다. 서울 25개 구 가운데 월세 매물이 늘어난 곳은 송파구(6.8%)와 강동구(212.8%)뿐이었다.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역 월세 가격도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매물이 적어 세를 구하기도 힘든데 더 비싸게 주고 살아야 하는 셈이다.

한국부동산원이 월 단위로 집계해 공개하고 있는 종합주택유형 월세통합가격지수는 2023년 5월 100.5를 기록한 이래로 2024년 5월 101.8까지 12개월 연속 증가했다. 서울지역 아파트로만 한정하면 월세통합가격지수는 2023년 5월 100.3에서 2024년 5월 102.2까지 올랐다.  

지금의 월세와는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서도 매달 일정량의 금액 및 현물을 지급하고 셋방살이하는 지방 출신 양반들이 여럿 있었다.

황윤석은 조선시대 영·정조 시기의 유학자로 전북 고창 출신이다. 그는 성리학자인 동시에 실학자로서 기풍을 가졌던 인물로 수학, 천문학,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기술사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소과에만 합격하고 고관대작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과에 합격하질 못해 관직은 낮은 지위에 그쳤으나 학문적으로는 많은 업적을 쌓아 호남에서 손꼽히는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서울 셋방살이는 조선시대에도 힘들어, 선비 황윤석이 첩 두려고 한 까닭은

▲ 황윤석이 저술한 이재난고의 모습. <고창군청>

영조가 사망하기 6년 전인 1770년 황윤석을 처음 만난 뒤 “비로소 오늘 인재를 얻었다”면서 “내가 황윤석을 만난 것이 너무 늦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황윤석은 당시 세손이던 정조를 가르치고 보좌하는 세손익위사 예비 후보자로 계속 거론될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실제 정조의 세손익위사를 맡은 것이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홍대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윤석의 능력이 당시 어느 정도까지 인정받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황윤석이 남긴 일기가 바로 ‘이재난고’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 10세이던 1738년부터 사망하기 2일 전인 1791년 4월15일까지 53년 동안 느꼈던 점, 배웠던 점, 경험한 점 등을 전부 담았다.
 
이재난고에 따르면 황윤석은 24세부터 60세까지 22차례 고향을 떠나 한양을 방문했다. 한양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따로 집을 구하지 않고 성균관 근처에 형성된 반촌에서 집을 빌려 살았다. 

조선시대 집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오늘날 월세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와는 사실 그 모습이 상당히 달랐다.

집주인은 단순히 집을 빌려주는 것을 넘어 손님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해야 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물품 구매 의뢰, 물건 빌려오기, 수리 의뢰, 의복 마련, 의복 세탁, 물품 및 자금 보관, 심부름, 대출 업무 대행 등이다.

그 대신 손님도 단순히 집을 빌린 대가를 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물 제공, 자금 대출, 편의 봐주기, 예비 하숙생 정보 제공 등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집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대를 이어서까지 자식, 손자까지도 이어졌다. 집주인은 대를 이어 가업으로 집을 빌려주는 일을 했고 양반들은 아버지가 머물던 집에 자신도 머무르는 것을 당연시했다.

황윤석은 22차례의 한양 생활 동안 집주인을 3명 거쳤다. 애초에 그는 집주인을 평생 바꾸지 않고 대를 이어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셋방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3명의 집주인 가운데 두 번째 집주인이 서반촌에 살던 김진태·김성빈 부자였다. 황윤석이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겪은 것이 바로 이 집에서 머물던 시기의 일이다. 
서울 셋방살이는 조선시대에도 힘들어, 선비 황윤석이 첩 두려고 한 까닭은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북 고창군 성내면에 위치한 황윤석 생가의 모습. <고창군청>



황윤석은 12차~14차 방문에서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이어가게 되면서 거의 3년을 한양에서 머물게 됐다. 이때 김진태 일가는 황윤석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진태 부자의 집에 머물고자 하는 손님이 많은 만큼 집주인이 갑의 위치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윤석이 1769년 8월27일에 작성한 일기를 살펴보면 황윤석의 종이 김진태 일가가 찾아와 집을 옮기라고 협박했다고 고자질하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더해 김진태 일가는 황윤석의 손님으로 찾아온 사람에게 밥을 차려주는 비용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나중에는 식사를 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등 박정한 모습을 보였다. 

황윤석은 1769년 3월8일 일기에서 “저녁밥 때 주인 부자에게 친구 김사겸의 밥을 함께 짓게 했더니 그놈이 완악하여 따르기를 기꺼워하지 않아 사겸이 마침내 자기 집주인을 찾아가 저녁밥을 먹고 다시 왔다”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김진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769년 3월12일 기존에 받고 있던 숙박비 쌀 12말과 별도로 2냥을 더 줄 것까지 요청했다. 황윤석이 그해 6월에 종7품으로 승진하면서 녹봉이 오르자 오른 녹봉으로 받은 쌀 13말, 말먹이콩 6말을 전부 내는 것에 더해 종을 고향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계속 거주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집주인의 패악질에 시달리다 못 버틴 황윤석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첩을 두는 방안이었다.

황윤석은 1769년 8월23일 숙직을 서다 부하 직원 이성춘을 불러 “집주인이 너무 싫고 괴로우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늙은 부모를 모셔야 돼서 그럴 수가 없다”며 “외모 같은 거는 따지지 않고 착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나이는 상관없으니 먹고 입는 일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황윤석에게 첩을 얻는 문제가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축첩의 이유로 떠올리는 정욕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애초 정욕을 위해서 첩을 얻고자 하는 것은 군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온 사람이기도 했다.

다만 황윤석은 부모와 처자식의 심정을 고려하고 첩을 들이기 위한 목돈 마련에도 실패하면서 결국 첩을 따로 두지 않고 셋방을 옮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황윤석은 1년 뒤인 1770년 7월 이수득의 집으로 셋방을 옮겼다. 새로운 집 주인인 이수득과는 사소한 돈 문제 정도를 제외하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그 뒤로 황윤석은 첩을 들이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황윤석이 첩을 들인 것은 고향집에 살던 아내가 사망하고 그 장례를 전부 치른 뒤인 1777년이었다. 첩은 고향에서 아내의 역할을 이어받아 노모 봉양, 살림 등을 맡았기에 황윤석의 한양 셋방살이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