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가 혈우병치료제인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을 중단한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제약업계에서 이례적인 일인데 녹십자가 한미약품 사태를 보면서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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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은철 녹십자 사장. |
녹십자는 미국식품의약국(FDA)에 혈우병치료제 그린진에프의 임상시험 중단을 신청하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녹십자는 2012년부터 그린진에프의 임상시험을 미국에서 진행해왔다. 그런데 혈우병이 희귀질환이기 때문에 임상 대상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으며 시험이 지연됐다. 이에 따라 투자비용이 늘어나고 출시 시기도 계획보다 미뤄졌다.
허은철 녹십자 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시장 상황과 투자효율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임상을 중단하기로 했다”며 “현실적으로 공략이 가능한 시장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녹십자는 미국 대신 중국에서 그린진에프의 임상을 진행한다. 녹십자는 중국에서 올해 7월 그린진에프의 임상시험을 승인받았는데 2018년까지 임상시험을 마친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녹십자 관계자는 “기존에 또다른 혈우병치료제 사업을 중국에서 지속해왔다”며 “그 기반을 활용하면 미국에 비해 투자비용을 낮출 수 있고 성공가능성은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녹십자는 약 20년 동안 중국에서 사업을 펼쳐왔다. 특히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또다른 혈우병치료제는 지난해 중국에서 시장점유율 35.5%를 나타내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임상중단 결정은 외부에 알릴 의무가 없다. 사업적 판단에 따른 결정일 뿐 임상에서 부작용 등 문제점이 발생해 시험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가에 악재가 될 수 있는 사안을 자율적으로 알린 셈이다.
녹십자를 비롯한 제약회사들이 그동안 국내 혹은 해외에서 진행하던 임상시험을 중단한 사례가 많았는데 이를 대부분 공개하지 않았다.
녹십자 관계자는 “시장에 정확한 정보를 공개해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녹십자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임상중단 사실을 알린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미약품 사태의 여파로 신약개발 리스크가 부각되고 있다. 신약개발이 성과를 내기까지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제약 및 바이오회사에 대한 투자심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임상시험 중단의 공개 여부를 놓고 녹십자 내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고 한다.
녹십자 관계자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임상시험 진행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비해 국내 기업은 그렇지 않았다”며 “국내 선두권 기업인 녹십자가 선례를 만들겠다는 경영진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말했다.
녹십자는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국내 제약회사 가운데 매출 3위에 자리했다. 녹십자와 함께 한미약품, 유한양행만 매출 1조 원을 넘겼다. [비즈니스포스트 이헌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