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드라는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를 맡은 변호사 뱅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정에서 재생된 녹음 파일 속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허상이고 거짓이다. 여러 겹의 진실로 구성되어 있는 현실에서 일부만 떼어냈을 때 그것이 과연 실체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사진은 ‘추락의 해부’ 메인 예고편 화면 갈무리.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비즈니스포스트] 제7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2024년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의 ‘추락의 해부’(쥐스틴 트리에, 2023)는 제목처럼 한 남자의 추락사를 해부하는 영화다. 본래 해부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행해지는데 이 영화는 해부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건 ‘부부의 세계’라는 이해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 해부의 대상 탓이다. 부부의 세계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다뤄졌다. 부부는 사랑, 믿음, 배신, 헌신, 절망 같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사람 사이에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추락의 해부는 상영시간이 무려 151분에 이르는 긴 영화로 법정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법정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게 장소가 법정일 뿐 법정 공방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장치일 뿐이다.
피의자와 증인 신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정작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주인공인 산드라와 사무엘 부부의 관계이다.
프랑스인 사무엘과 독일인 산드라는 런던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2년 전 사무엘의 고향인 알프스산맥에 있는 산꼭대기 마을로 이사를 왔다. 둘 사이에는 11살짜리 아들 다니엘이 있는데 4살 때 사고로 시각 장애를 갖게 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대학교수인 사무엘은 자신의 진짜 꿈인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시간적 여유도 없고 글쓰기에도 진척이 없어 늘 답답한 심경이다. 아들의 사고가 자신 탓이라는 죄책감까지 안고 있는 데다 경제적 여유도 없는 상황이다.
반면 진취적인 성격의 산드라는 출간하는 소설마다 화제를 모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예민하고 꼼꼼한 사무엘과 활달하고 추진력 있는 산드라는 많은 부부가 그렇듯 정반대의 성격 때문에 자주 부딪힌다.
산드라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여대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두 사람의 얼굴 클로즈업을 번갈아 보여주는 화면은 생동감이 넘친다. 와인에 살짝 취한 산드라는 오랜 만에 방문한 손님과의 대화에 들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위층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을 기약하며 끝이 난다. 3층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사무엘이 음악을 튼 것이다. 집안 전체는 물론 집 밖까지 들리는 소음 수준의 음악 소리는 이들 가정에 닥칠 불길한 사건의 전조이다.
안내견 스눕과 산책을 다녀오던 다니엘은 집 바로 앞에서 추락사한 아버지를 발견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자살보다는 타살로 추정되는 사건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아내 산드라다.
1년 넘게 이어진 법정 공방에서 의외의 사실들이 드러난다. 겉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적인 부부의 실체는 생각과 다른 점이 많았다. 이런 점이라면 몇 년 전 큰 인기를 끈 드라마 ‘부부의 세계’(JTBC, 2020)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추락의 해부에서 부부의 세계는 법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보인다. 정확히는 진술되고, 증언되고, 녹음 파일이 들린다.
산드라는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를 맡은 변호사 뱅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정에서 재생된 녹음 파일 속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허상이고 거짓이다. 여러 겹의 진실로 구성되어 있는 현실에서 일부만 떼어냈을 때 그것이 과연 실체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추락의 해부는 일반적인 대중영화 공식과는 달리 끝까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걸작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모호함 안에 진실을 담아두었기 때문이다. 관객을 통쾌하게 만드는 명확함 대신 단단한 모호함을 보여준 영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호함이 아니라 진실의 다면성을 입증하는 단단한 모호함이다.
추락의 해부를 보면서 세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 아내가 의심받는다는 점에서는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 부부 관계 혹은 중산층 가정 안에 내재한 위험이라면 ‘아이스 스톰’(리안, 1997)과 ‘아메리칸 뷰티’(샘 멘더스, 2000)가 그것이다.
아이스 스톰과 아메리칸 뷰티는 중산층 가정의 허상을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하게 그리고 있는 영화들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로 쓴맛을 느끼고 싶을 때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