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구형 반도체 '덤핑' 채비 갖췄다, 장비 물량 확보와 자급체제 구축에 속도

▲ 중국 반도체기업들이 미국 규제에 대응해 구형 반도체 생산을 크게 확대할 채비를 갖춰내며 저가 물량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SMIC 반도체 생산공장 내부 참고용 사진. < SMIC >

[비즈니스포스트] 중국 반도체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규제 시행을 앞두고 반도체 장비 수입 물량을 대폭 늘린 데 이어 자국 내 공급망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크고 미국의 무역제재 영향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구형 반도체 생산을 확대해 저가에 물량공세를 벌이기 위한 목적으로 분석된다.

14일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에서 주도하는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 노력이 꾸준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제조사 및 장비업체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해 연구개발 및 시설 투자에 활용하도록 하는 기조를 장기간에 걸쳐 이어가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중국 정부가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제공한 보조금이 1500억 달러(약 200조6천억 원)에 이른다는 미국 상무부의 분석도 나왔다.

특히 중국 기업들은 지난해 미국 정부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 강화가 결정된 이후 정부 자금을 반도체장비 개발 및 구매에 대거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 중국의 반도체 노광장비 수입 물량은 1년 전과 비교해 450% 증가했다”며 “1월부터 미국의 수출 통제가 적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의 압박으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중국 수출을 중단하도록 한 만큼 중국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대규모 물량을 확보해 시설 투자 여력을 확보한 셈이다.

중국 장비업체들이 해외에서 수입되는 장비를 자사 제품으로 대체하기 위해 지속해 온 연구개발 및 투자 성과도 예상보다 빠르게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증권사 번스타인에 따르면 중국에서 자국 반도체 장비기업의 점유율은 2019년 4% 안팎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약 14%로 상승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산업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잇따라 시행한 수출규제 조치가 다소 늦게 시행되며 중국 기업들이 자체 공급망을 구축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물론 중국 기업들은 트럼프 정부 시절부터 도입된 미국의 제재 영향으로 첨단 미세공정 반도체 등을 개발하거나 제조하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와 기술, 장비 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 정부의 반도체 육성 전략이 고사양 반도체 아닌 구형 반도체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전 세계에 미칠 영향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구형 반도체 '덤핑' 채비 갖췄다, 장비 물량 확보와 자급체제 구축에 속도

▲ 중국 SMIC 반도체공장 및 반도체 제품 관련 이미지. <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일반적으로 28나노 이상의 오래된 공정기술을 활용하는 반도체는 기술 장벽과 단가가 낮지만 전자제품과 자동차, 산업용 기계 등 분야에서 폭넓게 쓰이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정부 지원에 힘입어 공격적으로 생산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중국 반도체기업 입장에서는 구형 반도체에 역량을 집중하는 일이 더 효과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미국 정부 규제가 수 년째 중국의 첨단 반도체 기술 확보를 방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발전해 온 것은 중국이 구형 반도체에 투자를 늘리기 더 적합한 환경을 조성했다.

결국 중국이 구형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장비 수입 물량을 단기간에 대폭 늘리고 자국 기업을 통한 자급체제 구축에도 성과를 낸 것은 미국의 패착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중국 기업들이 이러한 장비를 활용해 본격적으로 구형 반도체 생산 투자에 전력투구하면서 저가에 대량의 반도체를 공급하는 ‘덤핑’ 전략을 쓸 채비를 갖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과 동맹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중국의 반도체산업 육성 노력을 더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해외에 의존을 크게 낮출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바라봤다.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더 낮아진 중국산 구형 반도체가 글로벌 시장에 널리 공급되기 시작한다면 다수의 해외 반도체기업은 수익성 확보에 부담을 안게 될 수밖에 없다.

TSMC와 같은 상위 파운드리업체 역시 구형 반도체가 실적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물량공세 전략에 타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전 세계에 중국 반도체산업의 영향력을 키워 미국 정부의 의도와 상반되는 결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이에 대응해 중국산 반도체에 덤핑관세를 부과하는 등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구형 반도체 특성상 주로 제품에 탑재된 상태로 판매되는 만큼 중국산 반도체 사용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관세 부과 대상을 선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정부는 반도체산업 육성에 효율성보다 국가 안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며 “막대한 정부 지원금을 들이는 일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셈”이라고 바라봤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