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탈원전을 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산업이라는 건 포기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국내 산업계 안팎은 물론 정치권까지 다양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과연 원전이 대통령과 정부의 뜻대로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비즈니스포스트가 짚어 본다.
①원전이 제 역할 할까? 넘어야 할 과제들 '험준'
②라이벌 지목된 대만 미국 독일, 원전과 이별 중
③송전망 확충도 험난, 한전 재정난과 주민 수용성 '숙제'
④‘화장실 없는 아파트’ 원전, 꽉 막힌 방폐장 확보
⑤원전이 만든 에너지로 생산한 반도체, 애플 MS에 팔릴까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대점검] 원전으로 만든 반도체, 애플 MS에 팔릴까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경기도 수원시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 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2030년. 현재 정부의 계획대로 평택, 화성, 용인, 이천 등 경기도 남부 일대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고 세계 최대 규모인 월 770만 장의 웨이퍼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사용하는 전력은 원전으로부터 충당된다.

그렇게 한국의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생산된 반도체는 세계 시장에서 제대로 팔릴 수 있을까?

26일 에너지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부는 조만간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를 내놓는다. 전기본은 정부가 2년마다 수립하는 15년 단위 계획이다. 이번에 마련되는 제11차 전기본은 2024~2038년에 걸쳐 적용된다.

업계는 제11차 전기본에는 9년 만에 신규 원전 건설계획이 포함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신규 원전의 건설 규모를 놓고 정부와 대통령실 사이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때부터 꾸준히 원전 확대를 주장해 왔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발표하면서도 전력 수요 충당을 위한 방법으로 원전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15일 경기도 수원시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 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반도체 공장 생산 라인 하나를 돌리는 데에도 인구 140여만 명의 대전이나 광주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며 “고품질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원전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전 확대를 위해서는 전력망 확충,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확보 등 하나하나 쉽지 않은 과제의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모든 과제를 해결하고 원전 확대에 성공해 반도체 클러스터에 전력을 무사히 공급하기 시작했다 가정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하나 더 남는다.

바로 판로 문제다.

반도체의 판로 문제와 관련해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3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원전으로 전력을 공급해 만드는 반도체’는 해외에 팔 수 없다”며 “RE100에 따라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전력이 재생에너지로 만들어져야 애플, 구글, BMW 등 주요 수요자에게 반도체를 팔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권 주요 기업을 중심으로 ‘RE100’ 달성 요구는 이미 확고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Renewable Electricity)로 충당하자는 캠페인이다.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더 클라이밋 그룹(The Climate Group)’이 주도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380여 개 주요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RE100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각 기업의 공급망 내 기업들에게도 RE100 달성을 요구한다. 지난해에는 유럽의 완성차업체인 BMW, 볼보 등이 RE100 대응 미진을 이유로 한국의 부품사와 계약을 취소하는 등 통상환경에서 현실적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RE100에서 말하는 재생에너지에는 원전이 포함되지 않는다. RE100에 참여하고 있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업들은 자신의 공급망 내에 ‘원전을 통해 만들어진 전기를 사용해 생산된 반도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대점검] 원전으로 만든 반도체, 애플 MS에 팔릴까

▲ 2023년 10월2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무탄소연합 출범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RE100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원전도 청정에너지로 포함하는 ‘무탄소에너지’라는 개념의 확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UN총회 연설을 통해 ‘무탄소연합(CFA)’ 결성을 제안한 뒤 국내에서 직접 기구를 설립하기도 했다.

다만 무탄소연합이 RE100을 대체하는 개념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원전을 포함한 무탄소전원을 청정에너지로 인정하자는 세계적 움직임은 분명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주로 ‘CF(Carbon Free) 100’으로 불리는 캠페인으로 유엔 에너지(UN Energy), 지속가능에너지기구, 구글 등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CF100의 취지가 RE100을 우회하거나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 CF100의 정식 명칭은 ‘24/7 무탄소전원(CFE, Carbon-Free Energy)’으로 24시간과 일주일(7일) 내내, 즉 항시 무탄소전원으로 생산된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RE100이 일단 화석연료로 생산된 전력을 사용한 뒤에 사용한 전력량만큼 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 등을 구입하는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반면 24/7 CFE는 실시간으로 무탄소 전원을 사용해야만 달성이 인정된다.

24/7 CFE가 RE100보다 더 달성이 어려운 과제이고 각자 주도하는 주체가 다른 캠페인인 만큼 상호대체가 가능한 개념도 아닌 셈이다. 원전을 청정에너지로 인정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한국 정부의 ‘무탄소에너지’와도 전혀 다른 개념이다.

반도체는 물론 세계적으로 산업 전반에 걸친 RE100 달성 요구가 후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반도체의 주요 고객사를 포함해 세계 선두 기업들은 이미 RE100 관련 대비를 거의 마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24/7 CFE를 주도하는 구글은 이미 2017년부터 RE100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해외 반도체 기업들의 RE100 대응 움직임도 분주하다.

대만의 TSMC는 2040년까지 RE100 달성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삼성전자가 세운 2050년 RE100 달성 목표와 비교하면 10년이 앞선 목표다.

대만 정부 역시 해상풍력을 확대하는 등 TSMC의 RE100 달성을 위한 움직임과 발을 맞추고 있다. 13일 치러진 차기 총통 선거에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민진당이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3연속 집권에 성공하면서 대만의 재생에너지 확대는 지속적으로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텔은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 조성을 위해 40조 원 이상 투자를 결정하는 등 재생에너지가 확보된 지역에서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늘려가고 있다. 독일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탈원전 국가다.

2022년 기준으로 인텔 전세계 사업장에서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90%를 웃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