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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허인철 이마트 대표(좌)가 국정감사에서 답변을 마친 뒤 자리를 나서고 있다. 허 대표의 불성실한 태도는 논란을 일으켰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우)이 증인으로 소환됐다. |
그룹 오너 전용기 등 ‘회장님’의 항공여행 때 전문적으로 서비스를 담당했던 한 승무원은 “회장님 앞에서는 대표이사나 신입사원이나 똑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설설 기더라는 얘기다.
허인철 이마트 대표가 물러나는 과정이 그 비슷한 모양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눈밖에 나고 결국 사퇴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신세계그룹은 7일 이마트의 허인철 영업총괄 대표이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이갑수 부사장을 내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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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갑수 이마트 대표 |
이 신임 대표이사는 지난 2009년부터 고객서비스본부장으로 모든 매장 영업을 총괄해온 영업·마케팅 전문가로 통한다. 이 신임대표는 1957년생으로 부산고와 경희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신세계에 입사해 백화점 판촉 및 상품기획(MD) 등 업무를 두루 거쳤다. 1999년말 이마트로 자리를 옮긴 뒤 마케팅, 가전레포츠, 판매본부 등에서 현장 업무를 익혔다,
이에 앞서 허 대표는 지난달 28일 열린 경영이사회에 참석해 사표를 제출했다. 그룹에서는 만류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명희 그룹회장에게 미리 사표 수리를 승낙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허 대표는 198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 신세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경영지원실 경리팀장, 관리담당 등을 맡아 재무전문가로서 능력을 발휘해 그룹의 신임을 얻었다. 2012년 이마트 대표에 올랐는데, 당시 매출 감소로 골머리를 앓던 이마트를 살려낼 구원투수로 전격 기용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허 대표의 사표 제출의 기미는 지난해 말 단행된 신세계 정기임원인사에서 일부 감지됐다.
신세계는 그동안 허 대표로 단독으로 이끌던 이마트에 김해성 신세계 경영실장을 경영부문 대표로 임명했다. 허 대표는 이 인사에 따라 영업총괄부문 대표로 권한이 축소됐다. 김 신임 대표는 2006년 신세계인터내셔날 대표를 맡은 후 매출을 4배 이상 올려 주목 받은 인물이다. 2012년 사장 승진에 이어 1년 만에 그룹 주요계열사인 이마트 대표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마트는 이 인사를 놓고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영업부문은 허 대표가, 경영부문은 김 대표가 맡는 ‘투톱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실상 허 대표에 대한 ‘좌천인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허 대표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모르쇠’로 대응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정 부회장이 증인으로 소환되기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좌천된 것이라는 얘기다.
허 대표는 지난해 10월 이마트 등 기업형 슈퍼마켓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해 “SSM(기업형 슈퍼마켓)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내가 맡은 회사와 상관없다”는 등 불성실한 답변만 했다.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의원들은 애초에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던 정 부회장을 국감장으로 불러냈다. 정 부회장은 “이마트 대표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등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허 대표의 태도는 유통 라이벌인 롯데그룹 전문경영인들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국감이 시작되기 전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계열사 사장단에서 자신들이 대신 증인으로 나가는 조건을 내거는 등 신 회장을 위해 육탄방어를 했다. 그 결과 신 회장은 증인 소환을 면제받았다.
그룹 관계자는 “허 대표가 국정감사 답변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최근 모친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퇴진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허 대표도 사의를 표명한 직후 “이미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라며 “이명희 회장님께 전화를 드려서 승낙을 받았다”고 말했다. 허 대표가 실질적 그룹총수인 정 부회장이 아닌 이 회장에게 직접 사표 수리를 승낙 받은 점도 허 대표와 정 부회장 사이의 관계악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