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가포르 우드랜즈에서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를 바라본 모습. 두 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조호르 코즈웨이를 자동차들이 통과하고 있다. 다리 옆으로 보이는 흰색 관이 두 나라 사이에 물이 오가는 수도관이다. <비즈니스포스트> |
[싱가포르=비즈니스포스트 이상호 기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제2의 도시 조호르바루는 ‘조호르 코즈웨이(Johor Causeway)’라는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다.
양국을 오가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는 조호르 코즈웨이에는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다리를 따라 연결된 크고 두꺼운 파이프 3개가 바로 그것이다. 파이프는 색깔까지 흰색이라 다리와 구분돼 더욱 눈에 띈다. 배경지식이 없이 바라봐도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다.
파이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도관이다.
자체 수자원이 부족한 싱가포르는 조호르 코즈웨이를 따라 놓인 수도관을 통해 오랜 기간 말레이시아로부터 담수를 공급받고 있다.
지역과 지역, 마을이나 마을 혹은 집과 집 사이여도 물이 오간다면 다양한 일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물이 오가는 상황이라면 얽힌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두 나라는 물을 놓고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싱가포르로서는 외교가 엮인 ‘워터리스크’를 벗어나는 일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싱가포르 정부는 물 사용 주기의 전반에 걸친 노력을 펼쳤다.
두 나라 사이 놓인 수도관이 오늘날 ‘물 관리 선진국’ 싱가포르를 만드는 주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싱가포르는 어쩌다 외국으로부터 물을 수입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수자원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기후변화의 영향 등에 따라 세계적으로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는 지금. 물을 외국에 의존했다가 활로를 찾아가는 싱가포르의 사례는 수자원 문제를 고민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싱가포르는 지도 북쪽에 놓인 조호르 코즈웨이를 통해 말레이시아와 연결돼 있다. 두 나라를 연결하는 길은 조호르 코즈웨이 하나였으나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싱가포르 서쪽에 다리를 추가했다. 오른쪽 사진은 조로흐 코즈웨이와 수도관을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 <구글맵, 싱가포르 국영방송 CNA 갈무리> |
◆곳곳에 밴 ‘물 절약’, 싱가포르의 1인당 물 사용량은 한국의 절반
“모든 물방울을 소중하게(Make every drop count).”
싱가포르 곳곳에서 싱가포르의 수자원 관리기관인 PUB가 내건 표어가 눈에 띈다. PUB의 표어가 아니더라도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어디든 물을 아끼자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양한 벌금이 많아 ‘벌금 도시(Fine City)’로도 불리는 싱가포르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놓는 것도 벌금이 부과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기자가 싱가포르에 머무는 동안 공공장소에서 만져본 모든 수도꼭지는 시간이 지나면 물이 잠기는 구조라 일부러 물을 틀어 놓기도 쉽지 않았다.
수도꼭지의 분출구를 봐도 공공장소는 물론 호텔 객실 내에 설치된 수도꼭지까지 샤워기처럼 물이 나오는 절수형으로 설치됐을 정도로 물 절약을 위한 노력은 싱가포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물 절약을 생활화해야 수자원이 부족한 싱가포르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출 수 있다고 보고 오랜 기간 국가적으로 ‘물 절약’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 싱가포르의 물 절약 정책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의 1인당 하루 평균 물 사용량은 2021년 기준으로 158리터 정도다. 2018년, 2019년에는 141리터까지 낮아졌으나 최근 다시 늘었다.
한국의 1인당 하루 평균 물 사용량이 2021년 기준으로 293리터다. 싱가포르의 1인당 물 사용량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셈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여전히 싱가포르의 1인당 물 사용량이 많다고 보고 2030년까지 1인당 물 사용량을 130리터까지 낮추겠다는 목표를 세워둔 상태다.
▲ 싱가포르 곳곳에서는 물을 아끼자는 표어를 볼 수 있다. 사진 속 표어에는 과일과 야채를 통에 담아 씻은 뒤 사용한 물을 식물에 주는 용도로 다시 사용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비즈니스포스트> |
◆물 재활용하고 수요까지 잡은 싱가포르, 취수지 확보까지 이어지는 전방위적 노력
마리나 베리지(Marina Barrage)는 싱가포르에서 외국인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숨겨진 명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기자가 9월13일 직접 마리나 베리지를 방문했을 때도 한국인은 물론 다른 외국인 관광객을 찾을 수 없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가족 단위 방문객과 유치원에서 온 아이들이 단체로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 조깅과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싱가포르 시민들만이 눈에 띄었다.
외국인들로 북적이는 주요 명소와는 달리 싱가포르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마리나 베리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싱가포르에서 본 그 어떤 풍경보다도 멋졌다. 도시 쪽으로는 마리나 베이 샌즈,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싱가포르 플라이어 등 싱가포르의 주요 랜드마크가 한눈에 들어왔으며 바다 쪽으로는 수많은 컨테이너선의 행렬이 장관을 이뤘다.
▲ 마리나 베리지는 싱가포르 강 하구를 바다와 분리하는 하구둑이다. 마리베리지를 통해 싱가포르는 도심지에 1만 헥타르에 이르는 저수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바다쪽으로 바라본 마리나 베리지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마리나 베리지는 본래 저수지 확보를 위해 2008년에 지어진 시설이다.
수자원 관리를 위해 하구둑을 만들었으나 공원이나 수상레져 등 여가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꾸며 놨다. 싱가포르의 국토가 좁아 도심지에도 수자원 관련 시설을 만드는 일이 불가피한 만큼 시민들이 친근하게 찾을 수 있는 장소로 계획됐다.
싱가포르에 저수지 확보는 매우 중요한 숙제다. 싱가포르의 수자원이 부족한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저수지의 부족이기 때문이다.
PUB는 “마리나 베리지의 건설로 싱가포르는 유역면적이 1만 헥타르에 이르는 저수지를 도심지에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마리나 베리지가 만들어 낸 저수지는 싱가포르 내에서는 저수 규모가 가장 크다”고 설명한다.
싱가포르가 하수를 재처리한 뉴워터를 통해 새로운 상수원을 확보하고 철저한 물 절약을 통해 수요를 관리하면서도 지역 집수(Local Catchment) 역시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 마리나 베리지는 싱가포르의 도심 인근에 지어진 만큼 시민들의 접근 가능성도 고려해 지어졌다. 마리나 베리지에서는 싱가포르의 주요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공원으로도 활용되고, 수상활동도 가능하다. <비즈니스포스트> |
◆싱가포르는 왜 물이 절실할까? 말레이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물과 ‘헤어질 결심’
취수부터 수요, 사용된 하수까지 물 순환의 전체 영역에 걸친 싱가포르의 수자원 관리 노력은 이제 세계자원연구소(WRI)가 선정하는 최악의 물 부족 국가에서 벗어났을 정도로 결실을 보고 있다.
세계자원연구소는 올해 8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최악의 물 부족 국가로 바레인, 키프로스, 쿠웨이트, 레바논, 오만 등 5개국을 선정하며 “싱가포르처럼 물 관리를 효율화하고 물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여전히 1인당 물 사용량을 줄이고 뉴워터의 상수원 비중을 늘리는 계획을 세우는 등 수자원 관리에 고삐를 죄고 있다.
싱가포르의 4대 상수원(Four National Taps) 가운데 하나인 ‘수입하는 물(Imported Water)’의 비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물을 수입하는 곳은 인접 국가인 말레이시아다.
싱가포르의 상수원에서 말레이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물의 비중은 과거에 절반 이상이었으며 현재도 40% 안팎에 이를 정도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장기적으로 말레이시아로부터 더는 물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수자원이 넉넉지 않은 싱가포르가 물 수입을 멈추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상수원의 절반 정도를 책임지고 있는 물 수입을 중단한다고 해서 그만큼 물 수요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상수원으로 부족분을 채워야 한다.
싱가포르가 수자원 확보에 들이고 있는 전방위적 노력을 생각하면 언뜻 보기에 물을 돈으로 사서 구하는 일이 가장 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싱가포르는 2022년 기준 1인당 GDP가 8만2807달러로 세계 5위를 차지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나라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싱가포르가 수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말레이시아로부터 물을 공급받지 않으려는 것일까?
▲ 싱가포르 도시개발청(URA)는 '시티 갤러리'를 마련해 싱가포르의 도시계획을 홍보하고 있다. 사진은 9월12일 시티 갤러리를 방문해 싱가포르 미니어쳐를 촬영한 모습. 마리나 베리지를 통해 확보된 담수지역이 밝은 청색으로 표현돼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말레이시아에서 떨어져 나온 싱가포르, 독립 때부터 이어진 수자원 갈등은 여전
싱가포르는 1965년 8월9일 말레이시아 의회가 싱가포르를 말레이연방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국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됐다.
싱가포르의 독립은 흔히 ‘축출’ 혹은 ‘독립을 당했다’고 표현된다.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 내에서 급증하는 중국인 이민자들과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분리독립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독립 이전부터 자치정부를 이끌었던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초대 총리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연방 제외가 결정된 날 기자회견을 열고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포한다. 리콴유는 이후 싱가포르의 성공을 이끌어 오늘날까지 국부(國父)로 여겨진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독립을 맞이했을 당시 리콴유가 느꼈던 감정은 비통함이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 중에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만큼 싱가포르에 주어진 여건은 혹독했다.
▲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1965년 8월 싱가포르의 독립 관련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속 장면은 '리콴유의 눈물'로 불리며 싱가포르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싱가포르 국영방송 CNA 유튜브 영상 갈무리> |
싱가포르는 19세기부터 영국이 국제 무역항으로 키워온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발전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한 도시일 때의 이야기다.
국가로서 싱가포르를 바라보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국가 사이에 끼인 위치와 작은 영토는 물론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인종이 섞인 인구 구성까지 나라의 기본적 요소 하나하나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가 가득했다.
특히 인간의 생존에서 기본이 되는 수자원의 관리부터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였다.
싱가포르는 적도 근처에 위치해 일 년 내내 따듯하고 습한 열대우림기후(Af) 지역이라 비가 자주 내린다. 하지만 땅이 넓지 않아 내리는 비를 담아둘 저수지가 부족해 자체적으로는 수자원 수요를 충당할 수 없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외지에서 물을 끌어 와야 하는 지역이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일부일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정치적으로 분리가 될 때는 반드시 별도의 협정이 필요했다.
싱가포르는 영국령이던 1927년 당시에는 조호르 왕국과 물 공급 협정을 맺었다.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싱가포르가 분리되기 전인 1962년에도 물 공급 협정이 다시 체결됐다.
당시 협정 가운데 일부가 종료되거나 수정되는 등 변화는 거쳤지만 2061년까지 99년 동안 지속한다는 내용은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공급받은 담수를 정화해 다시 말레이시아로 수출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관계가 악화될 때나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싱가포르에 단수 위협, 재협상 등을 꺼내며 물 공급을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2018년에도 말레이시아에서는 재집권에 성공한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가 “부자나라인 싱가포르가 저렴한 가격으로 물을 사가고 있다”며 싱가포르에 재협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첫 집권 때인 1981~2003년 당시부터 리콴유와는 사사건건 갈등을 벌였던 사이였고 당시에도 물 공급 문제는 중요한 갈등 지점이었다.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를 향한 단수 조치까지 꺼내들 때 리콴유가 한 말에는 오늘날 싱가포르가 왜 자체적으로 수자원을 확보하려 그토록 노력하는지 알 수 있는 결의가 담겨있다.
“말레이시아가 수도꼭지를 잠근다면 싱가포르는 군대를 보낼 준비도 돼 있다.”
▲ 아세안(ASEAN) 지역 내 협력이 강해지면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사이 교류, 협력 분위기도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양국 사이 '물 값' 문제는 페드라 브랑카 섬 영유권 문제 등과 함께 현재도 주요 외교 현안이다. 사진은 올해 1월30일 싱가포르에서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오른쪽)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아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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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리스크, 물이 산업안보다] 폭우와 가뭄 등 극단적 기후현상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점차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9월 한반도에 몰아친 115년 이래 최악의 폭우로 포항제철소 고로는 사상 처음 가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공장 운영에 필요한 수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투자 계획을 고심하고 있다. 물이 너무 많아도, 부족해도 문제다.
인구 증가와 산업 활성화, 기후변화로 ‘워터리스크(water risk)’, 물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일이 산업 안보에 중요한 과제가 됐다. 워터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반도체, 철강, 화학, 발전 등 주요 산업은 물론 국가와 지역경제도 위험해진다.
비즈니스포스트는 CDP한국위원회를 맡고 있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함께 국내외 주요 기업과 물 관리 선진국의 리스크 관리 및 대응사례를 발굴해 보도한다. 최신 동향과 해법 관련 기사들은 비즈니스포스트 워터리스크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