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미국 정부를 뒤따라 반도체 지원법을 시행하며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여러 약점을 안고 있어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이 반도체 연구센터 또는 생산공장을 신설하는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유럽판 반도체 지원법’을 시행하며 미국 정부와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반도체 전문인력 및 고객사 기반 부족, 엄격한 친환경 규제 등을 고려한다면 글로벌 반도체기업이 적극적으로 투자를 검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포브스 등 외국언론 보도에 따르면 유럽 반도체 지원법이 분명한 한계를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고개를 든다.
유럽연합이 반도체 지원법 시행을 통해 미국 정부와 본격적으로 보조금 경쟁에 나섰지만 이미 여러 측면에서 투자 유치에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포브스는 “유럽연합이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20%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이뤄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앞으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현재 유럽이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안팎에 그친다. 이를 두 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글로벌 대형 반도체기업의 투자 유치가 필수적이다.
인텔과 TSMC는 유럽연합 및 소속 국가에서 제공하는 보조금을 노려 독일에 각각 330억 달러(약 44조 원), 100억 달러(약 13조4천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파운드리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도 프랑스에 합작 생산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 도입을 논의할 때부터 시행을 확정한 이후인 2022년 말까지 2천억 달러(약 267조 원)의 투자를 유치한 것과 비교하면 아직 유럽연합의 성과는 크지 않은 수준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으로 약속한 보조금 규모는 모두 520억 달러(약 69조5천억 원),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보조금 규모는 450억 달러(약 60조 원)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유럽연합이 처음 반도체 보조금 도입을 논의할 때부터 현재까지 미국보다 훨씬 적은 규모의 투자를 확보한 데 그친 이유로는 반도체기업들의 소극적 태도가 이유로 꼽힌다.
당장 유럽에 투자를 결정한 인텔과 TSMC의 사례만 봐도 미국 반도체공장 규모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다. 두 기업은 각각 미국에 400억 달러(약 53조5천억 원) 이상의 투자를 예고했다.
미국에는 애플과 퀄컴, 브로드컴에 이어 엔비디아와 AMD, 아마존과 구글 등 다수의 첨단 파운드리 고객사가 존재하는 반면 유럽의 고객 기반은 제한적이라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TSMC가 독일 파운드리 공장을 독자적으로 설립하는 대신 보쉬와 인피니언, NXP 등 자동차용 반도체 고객사와 합작법인 형태로 투자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세운 점이 근거에 해당한다.
다른 고객사를 확보하지 않아도 이들 협력사를 통해 공장 가동률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 고객사 기반 부족에 따른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텔은 유럽 공장에서 자체 개발하는 CPU 및 GPU 등 제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고객사 확보와 관련한 부담이 비교적 크지 않다.
결국 미국에 비해 대형 반도체 고객사가 턱없이 부족한 유럽에서 글로벌 반도체기업의 적극적 투자를 유치할 만한 유인책이 부족한 셈이다.
▲ 인텔이 독일에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반도체공장 예상 조감도. <인텔> |
포브스는 유럽의 반도체 전문 인력 부족과 엄격한 친환경 에너지 규제도 미국과 비교해 반도체 투자 유치에 안고 있는 중요한 약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시스템반도체 생산이 주로 이뤄지는 한국과 미국, 대만 등 국가와 비교하면 유럽에는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포브스는 유럽이 반도체 전문인력 확보를 위해 이민 정책을 개선하거나 인재 양성을 위한 투자를 대폭 늘리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유럽연합이 엄격한 친환경 규제를 앞세우는 만큼 반도체기업들이 재생에너지 활용에 집중해야만 한다는 점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혔다. 특히 반도체는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 산업에 해당해 친환경 정책과 반도체 육성 정책이 서로 상충할 공산이 크다.
미국 정책전문지 워싱턴이그재미너는 “유럽연합은 미국과 경쟁을 위해 비슷한 수준의 반도체 지원금을 꺼내들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여러 약점을 고려한다면 글로벌 반도체기업이 미국 대신 유럽에 대규모 생산 투자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에 170억 달러(약 22조7천억 원)를 들여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신설하는 반면 유럽에는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보여주는 예시로 들 수 있다.
워싱턴이그재미너는 “유럽은 반도체 생산 능력에서 미국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지만 미국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막대한 보조금 투자에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수 있다고 바라봤다.
다만 유럽연합 역시 이러한 약점을 분면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힘쓰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최근 보도자료를 내고 “반도체 인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며 “반도체 지원법 시행을 계기로 모든 공급망과 산업 측면을 아우르는 협력 관계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