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연차 판매 금지 5년 늦춘다, 정치권·자동차업계 "환경정책 퇴보" 비판

▲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20일(현지시각) 기자회견을 열고 내연차 판매 중단 시한을 늦추는 등 기존 환경 정책을 수정한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영국 정부가 2030년까지로 예정됐던 내연차 판매 중단 시한을 5년 늦추는 등 환경 관련 정책에서 태도 변화를 보였다. 가정용 가스보일러 설치 중단 계획도 완화됐다. 

영국 정부의 이번 결정을 놓고 영국 정치권과 자동차 기업 등 안팎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퇴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20일(현지시각)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휘발유, 경유차의 신차 판매를 금지하는 시기를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미룬다”며 “가정용 가스보일러 설치를 2035년까지 100% 중단하겠다는 계획도 ‘80% 폐지’로 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낵 총리는 그밖에도 주택의 단열 효율을 일정 수준 이상 높이지 않는 소유주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하는 계획을 취소하는 등 영국 정부가 추진하던 환경정책의 속도를 늦추거나 완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결정이 영국의 환경정책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수낵 총리는 “영국은 국제적으로 약속한 2050년 탄소중립 계획을 지킬 것”이라며 “다만 더 나은, 더 균형 잡힌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결정은 기후변화 정책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올해 11월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도 직접 참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의 주요 매체들은 수낵 총리의 이번 결정이 내년 1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보수당이 야당인 노동당에 지지율이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을 의식한 결과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가디언은 수낵 총리의 결정을 놓고 “소비자들의 직접 부담을 줄여 총선에서 노동당과 차별화를 의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로이터는 “수낵 총리는 환경정책 축소를 통해 부동표를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바라봤다.

실제로 보수당은 지난해 7월에 치러진 런던 옥스브리지 선거구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노동당 소속인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의 배기가스 억제 정책을 대상으로 공세를 펼쳐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다. 

다만 여당인 보수당 내부에서도 수낵 총리의 결정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이 세계 최초로 법적 구속력 있는 목표로 2050년 탄소중립 계획을 세우는 등 기후위기 대응에 선도적 역할을 해 온 것은 이전 보수당 정권의 주요 성과이기 때문이다.

보수당 소속인 잭 골드스미스 전 환경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수낵 총리는 점수를 따기 위해 환경정책을 정치적 불씨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올해 6월 수낵 총리가 환경정책에 무관심하다며 장관직을 내놓았다.

보수당 소속이자 환경정책에 공을 들였던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역시 “현재 시점에서 환경정책이 흔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사업 영역에서 기업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결국 영국 가계에 물가 부담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반응을 내놨다.

수낵 총리는 이번 발표에서 “이전 정부가 대중의 지지는 확보하지 않은 채 기후위기 대응 속도를 너무 빠르게 설정해 놨다”며 “당시 환경정책이 소비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강요해서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존슨 전 총리의 재임 당시 수낵 총리는 재무장관을 맡았었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도 영국 정부가 정책 일관성을 해쳐 기업에 불확실성을 높였다며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포드의 영국법인 대표인 리사 브랭킨은 “포드는 전기차 생산을 위해 영국에 4억3천만 파운드(7100억 원)을 투자했다”며 “이번 결정은 우리가 영국 정부에 기대하는 야심, 헌신, 일관성을 모두 훼손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 역시 공개 성명을 통해 “영국 정부의 이번 결정은 복잡한 공급망 협상과 제품 계획에 변화를 유발하고 잠재적으로 소비자와 업계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