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동쪽기슭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1786년 겸암 류운룡 선생을 기려 세워졌다. <하회마을 홈페이지> |
[비즈니스포스트] 조선조 초기 류종혜 선생이 하회마을에 입향한 뒤, 선생의 자손들은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유복하게 지냈고, 하회의 류씨 가문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번창했습니다.
하회 마을에 먼저 들어와 살던 허씨와 안씨 가문의 가세는 반대로 서서히 위축되었습니다. 두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하회를 떠났고 200여 년 뒤에는 몇 가구만 남았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하회 마을은 연화부수형의 명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류씨 가문은 연화부수형의 연꽃 부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허씨와 안씨 가문은 꽃이 아닌 곳에 자리 잡고 살았었습니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려면 많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꽃봉오리로 보내야 합니다. 그만큼 다른 부위들은 적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류씨 가문이 연꽃 부위에 자리 잡으면서 연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꽃이 봉오리를 맺고 활짝 피어감에 따라 다른 부위의 기운은 점점 쇠약해졌고, 여기에 살던 이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연꽃이 활짝 피어나 류씨 가문이 크게 번창한 뒤엔 허씨, 안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연화부수형의 명당은 가까이에 좋은 물이 있고 물 건너에 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물의 기운 덕에 부와 귀 중에서 먼저 많은 재물을 얻어 큰 부를 이룹니다. 그런 다음 주변 산들의 형상에 따라, 귀를 얻게 됩니다. 산들의 형상이 빼어나게 수려하면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고, 수려하지 않으면 부자들만 나옵니다.
류씨 가문도 하회마을로 들어온 뒤에 재산이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자손도 번창했고 많은 자손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하회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또, 많은 재물이 모여 가문 사람들이 모두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천석군이나 만석군은 얼마 없었지만, 가문 전체의 재산은 엄청나게 큰 규모였습니다. 기업으로 치면 거대한 대기업은 얼마 없지만, 탄탄하게 성공한 중소 우량 기업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을 전체의 재산 규모는 매우 컸습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의 수세도 훌륭하지만, 주산을 비롯한 안산과 청룡 백호의 산세도 매우 빼어납니다. 그런데 안산은 가깝지만, 주산과 청룡 백호는 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뛰어난 인물, 훌륭한 귀인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나왔습니다.
류종혜 선생의 4대손 중에 류공작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손자가 서애 류성룡 선생입니다. 류공작 선생은 간성군수와 통례원 인의를 지냈습니다.
간성은 강원도 동해 바닷가에 자리 잡은 고을로 해산물이 풍부하여 예나 지금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습니다. 선생이 부임하기 전에 간성군수를 역임했던 이들과 서리들은 탐관오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만들어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저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백성들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도망쳤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류공작 선생은 바로 부당한 세금을 모두 없앴습니다. 선생의 선정은 곧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도망쳤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며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선생은 애민정신이 매우 돈독하여 매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하회 류씨 가문은 류종혜 선생의 5대손에 이르러 관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자손들이 나왔습니다. 5대손 중 두 사람이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한 사람은 류성룡 선생의 부친 류중영 선생( 1515~1573)이고, 또 한 사람은 류중영 선생의 사촌 동생인 류경심 선생( 1516~1571)입니다.
류중영 선생은 승지, 예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류경심 선생은 형조참판, 예조참판, 병조참판,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습니다. 두 사람은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류공작 선생처럼 많은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류경심 선생은 임금으로부터 선정에 대한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 안동 하회마을 화천 상류에 자리잡은 겸암정사는 겸암 류운용 선생이 1567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던 장소다. <하회마을 홈페이지> |
5대손을 지나 6대손에 이르러는 하회마을 연화부수형의 정기가 난만히 활짝 꽃피었습니다. 이 정기를 받아 아주 특별한 두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서애 류성룡 선생과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입니다.
류성룡 선생은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 중 한 분이라 너무 유명한 분이지만, 류운룡 선생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류운룡 선생(1539~1601)은 류중영 선생의 장자로 학식과 지혜와 덕이 아주 높은 현자였습니다. 그는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인품이 매우 고매했다고 합니다. 야사와 야담에 따르면, 선생은 정신 수양을 깊이 하여 특별한 통찰력과 예지력도 있었다고도 합니다.
여러 야담에는 선생이 뛰어난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임진왜란을 예견했으며,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동생 류성룡 선생에게 왜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조언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옵니다. 임진왜란이 실제 일어나자 동생에게 왜적을 물리칠 방책들도 많이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야담들의 사실 여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선생과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져오는 것을 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선생에게 범속을 초월한 고인의 면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선생과 관련해 특별한 일화가 또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고려시대부터 왕조의 흥망성쇠와 도읍지에 관한 예언들이 전해내려 왔습니다. 그 예언들에 따르면, 고려의 왕씨 왕조 다음엔 이씨 왕조가 세워지는데 이씨 왕조가 세워지며 이씨 왕조의 도읍지가 한양 땅이 되리라 했습니다.
이씨 왕조가 끝난 뒤 한양 땅 다음의 도읍지는 계룡산 아래가 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계룡산 일대에는 선생이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길 때 중요한 국가기관들이 자리잡을 장소에 관해 예언했단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그 예언 내용을 겸암의 계룡사부론이라 부릅니다.
선생은 학문과 수행에 뜻이 깊어 과거도 보지 않았고 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명한 현자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음서 제도로 출사하게 되어 진보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선생은 어질고 지혜로운 목민관으로 백성들을 잘 보살펴서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