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로지스틱스를 6천억 원에 매각했다. 구조조정 ‘우등생’다운 성과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 보면 복잡한 셈법이 있다. 현 회장은 현대그룹 지배구조도 유지하고 돈도 마련하는 길을 선택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현 회장이 정작 손에 쥔 돈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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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현대그룹은 17일 일본 금융회사 오릭스와 공동으로 특수목적법인(SPC)를 설립하고 이 SPC에 현대로지스틱스를 6천억 원 상당에 매각하는 주식 매매계약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매각대상은 현대상선(47.67%), 현대글로벌(24.36%), 현대증권(3.34%) 등 현대그룹 계열사와 현정은(13.43%) 회장이 보유한 현대로지스틱스 지분 88.88%다.
인수 주체인 신설 SPC는 오릭스가 자본금의 70% 상당인 2400억 원을, 현대상선이 나머지 30% 상당인 1천억 원을 공동출자하면서 설립됐다. 신설 SPC가 향후 현대로지스틱스를 재매각해 차익을 남길 경우 오릭스와 현대그룹이 그 차익을 나누게 된다.
◆ 정작 손에 쥔 돈은 6천억의 절반
현대로지스틱스는 현대그룹 지배구조 핵심인 순환출자 고리의 한 축을 담당한다.
현대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현대글로벌-현대로지스틱스-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글로벌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다.
현대로지스틱스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9.95%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현정은 회장은 현대로지스틱스 매각으로 향후 일어날 지배력 약화를 우려해 이 지분을 사들여야 한다.
이 지분의 시장가치는 1480억 원 정도다. 현 회장은 현대글로벌을 동원하거나 스스로 돈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로지스틱스가 6천억 원에 팔렸지만 현대그룹이 실상 손에 쥐게 될 돈은 그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대로지스틱스 매각대금에서 신설 SPC 출자금,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재매입 비용 등등을 고려하면 3520억 원 정도에 그친다.
게다가 신설 SPC가 현대로지스틱스를 다시 매각할 때 6천억 원 이상을 받지 못할 경우 그 금액은 더 줄어들게 된다.
애초 롯데그룹이 현대로지스틱스 매각가격으로 제시했던 금액은 3500억 원 상당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부채비용 등을 포함해 1조 원을 요구하면서 거래가 무산됐다. 그러면서 현대그룹은 신설 SPC에 6천억 원으로 낮춰 팔았고 자본금 1천억 원도 출자했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로지스틱스 매각과정에서 SPC 설립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이유는 그룹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현대로지스틱스를 매각해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순환출자 고리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 지배구조가 흔들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의 백기사 오릭스가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SPC 설립은 현대그룹에서 현대로지스틱스를 최대한 늦게 떼어내려는 셈법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은 애초 현대로지스틱스 기업공개를 추진했다가 경영권 매각으로 선회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관계자는 “현대로지스틱스가 그룹 물량을 갖고 있는 등 사업관계가 있어 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SPC 설립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현대증권 매각에 쏠리는 눈길
현대그룹은 지난해 12월 3조3400억 원 규모의 자구안을 내놨다.
이번 현대로지스틱스 매각(6천억 원)을 포함해 현대상선 LNG전용선 사업부문 매각(9613억 원), 유가증권과 부동산 등 자산매각(3503억 원), 외자유치(1140억 원), 부산신항만터미널 투자자 변경(500억 원),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1803억 원), 현대증권 등 금융 3사 매각 (2천억 원) 등을 통해 자구안의 74%(2조4559억 원) 정도를 이행했다.
그러나 신설 SPC 설립 출자금, 현대엘리베이터 지분매입 비용 등을 고려하면 자구안 이행률을 66%(2조2079억 원) 가량으로 떨어진다.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 실제 자금 규모도 그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현대그룹이 자구안 이행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말도 나오지만 성공은 현대그룹 자구안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현대증권 등 금융 3사 매각이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지난 4월 산업은행과 현대증권, 현대저축은행, 현대자산운용 등 금융3사 매각을 확정하면서 2천억 원의 자금을 우선수혈받았다. 현대그룹은 금융3사 매각가격을 모두 7천억~1조 원 정도로 보고 있어 현대그룹 뜻대로 매각이 완료될 경우 최소 5천억 원의 추가자금을 확보하게 된다.
지난 5월 진행된 현대증권 패키지 인수를 위한 예비입찰에 오릭스, 자베즈파트너스, 파인스트리트 등 3곳이 참여했다. 인수 후보자 3곳은 이달 말부터 실사에 들어가게 된다. 아직 실사가 개시되지 않아 현대자동차그룹 등 범 현대가 참여 가능성도 열려있다.
반얀트리호텔 매각도 남아있다. 산업은행과 한영회계법인이 반얀트리호텔 매각을 주관하고 있지만 아직 인수의향서를 받지 못한 상태다. 현재 시장에 대형 호텔 매물이 넘쳐나 매각이 이른 시일 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대그룹이 금융3사를 성공적으로 매각할 경우 자구안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얀트리호텔 매각을 철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