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가득하고 성 밖 또한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하략)"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최명길의 말이다. 최명길은 청나라가 침범한 병자호란 당시 갇혀 굶주리는 성 안에서 명나라와 대의를 논하는 조정 대신들의 말 속에 정작 백성의 삶이 가벼이 다뤄지는 것을 타박한다.
 
[데스크리포트 5월] 삼성과 SK 반도체에 '퍼펙트 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 미국의 진영논리와 자국중심주의에 따른 중국을 향한 반도체 제재 속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생존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말은 분명한 삶의 실체를 다루지 않으면 난무하게 된다. 그런 말은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며 흐릿해진다. 흐릿해지면 결국 헛것일 뿐이다. 말은 구체적으로 실제의 것을 다룰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윤석열 대통령의 4월 하순 미국 국빈 방문은 대의를 담은 말의 성찬이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덕담이 두 나라 정상 사이에 오갔다. 

윤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각)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가진 연설과 대담 행사에서 "한미동맹은 단순히 이익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편의적 계약 관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가치동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국빈 방문에서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과 미국 사이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뼈대로 하는 워싱턴 선언이 채택된 점이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안보는 제일 중요한 생존의 문제다. 그러니 워싱턴 선언에 담긴 말이 헛것은 아니다. 미국의 북핵 억제 전략에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핵문제 관련 정보도 공유하기로 한 만큼 의미가 없지는 않다. 

다만 워싱턴 선언 채택 직후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핵공유'라는 문제를 놓고 바로 엇박자가 나왔다. 대의의 말이 한미 양국 사이를 서로 오가며 뒤엉켰고 그 와중에 안보 강화라는 실체도 흐릿해진 셈이다.

사실 미국은 국내법에 따라 핵 사용 문제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자국의 이익 차원에서 미국 대통령이 결정한다. 핵공유는 그 상대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됐든 한국이 됐든 레토릭에 가깝다는 분석이 많다. 핵공유는 미국의 안보 문제에서 동맹국과 우의 강화라는 대의의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 과정에서 한미동맹 강화라는 대의가 오가는 사이 우리 경제와 기업의 생존에 중요한 나라인 중국을 자극하는 말도 함께 나왔다. 

대신 미국을 상대로 우리 기업의 살길을 마련하기 위한 말은 사라졌다. 특히 미국 반도체법에 따라 우리 기업에 가해질 규제의 완화 문제를 놓고 윤 대통령은 별다른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했지만 중국에서도 낸드의 40%를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미국에 패키징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중국에선 D램의 40%를 제조한다. 인텔에서 사들인 낸드 공장도 있다.

미국은 반도체법에 따라 자국에 투자한 기업에 보조금을 주지만 대신 그 대가로 중국 내 반도체 투자 확대를 제한한다. 또 영업비밀을 제공해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 투자해 번 돈의 상당 부분도 토해내야 한다고 강요한다. 

미국 안에서도 애초 이 반도체법을 놓고 지나치게 자국 중심적이며 무리하다는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이 반도체법과 장비 수출 규제의 영향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자칫 중국에서 올리는 반도체 매출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이다. 

또 영업기밀이 미국 정부로 빠져나가면 한국의 반도체 공급망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놓고 미국 대통령에게 말하지 않았다. 또 반도체 장비의 대중국 수출 제한과 관련해 중국 내 한국 기업에게 적용된 예외 조치의 연장 같은 문제 역시 이번 국빈 방문에서 다루지 않았다.

미국은 안보의 핵심으로 바라보는 반도체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꾸리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자국 내 반도체산업을 진흥하려는 중국을 강력하게 제재하고 있다.

이런 두 강대국의 패권 다툼 속에 우리 경제와 기업들은 시들어 가고 있다. 중국을 향한 반도체 수출이 부진하면서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4월까지 14개월째 적자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반도체 사업에서 올해 1분기에만 합산 8조 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봤다.
 
[데스크리포트 5월] 삼성과 SK 반도체에 '퍼펙트 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이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산업 패권 다툼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고심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 반도체 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와 관련한 한국 대통령의 실체적 말이 이번 미국 국빈 방문에서 나오지 않았다. 국빈 방문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서는 매우 아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정부가 앞으로도 미국과 중국의 패권 대결 한 가운데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진영안보 논리의 하위 개념에 경제를 계속 놓는다면 반도체산업을 비롯한 우리 경제에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외교라는 총 없는 전쟁에서 우리 기업의 생존 문제에 관한 실체적이고 정제된 말을 내놓지 못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쌓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성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어쩌면 한국 경제를 집어삼킬 '퍼펙트 스톰'이 국제외교 무대에서 커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