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회사 지키기는 끝나지 않는 지난한 싸움 같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을 손해배상금으로 물어줘야 한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최근 나왔다.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가 2014년 현 회장 등 이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 소송의 결과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 이사진이 금융회사들과 현저하게 불리한 파생상품계약을 맺는 결정을 내려 10여년간 회사에 8천억 원대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판결로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배상해야 하는 금액은 이자를 포함하면 270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현 회장이 결국 현대그룹 경영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지분까지 매각해야 하는 상황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배상금 지급에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2006년부터 국내외 금융회사들과 파생상품계약을 맺은 것은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때문이었다.
2003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부인인 현정은씨가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KCC 등 범현대가는 처음에는 현대엘리베이터의 백기사 노릇을 하겠다며 지분을 매집했다.
그러다가 정씨 집안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다시 갖고오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내비치며 현 회장 측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현대그룹 출자구조를 보면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을 지배하고 현대상선이 여러 계열사를 지배함으로써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형태였다.
2004년 KCC는 3개의 펀드를 동원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40%대까지 매집하고 현대그룹 경영권을 확보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지분매집과정에서 이른바 ‘5%룰(대량지분보유 공시)’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나 금융당국으로부터 의결권 제한조치를 받는 바람에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에서 현 회장측에 패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26%까지 끌어올려 현 회장 측을 긴장시켰다.
당시 KCC가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6%를 더하면 범 현대가측 지분이 32%에 달해 현 회장측(30%)보다 많았다.
이때부터 현 회장측은 우호지분 확보를 위해 현대상선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한 차액정산옵션이나 TRS(Total Return Swap, 총수익수왑) 계약 같은 것들을 체결하게 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A금융사가 현대상선 주식을 1억 원어치 사면 현대엘리베이터는 1억 원에 대해 연 5%의 수수료를 A사에게 지급하기로 계약한다.
계약만기(예컨대 5년)가 되면 A사의 지분처분에 따른 차액을 정산한다.
예를 들어 A사가 현대상선 지분을 1억3천만 원에 처분한다면 이익 3천만 원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챙겨간다. 만약 6천만 원에 처분한다면 손실 4천만 원은 현대엘리베이터가 A사에 보전해준다.
계약기간동안 A사는 현대엘리베이터와 같은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주기로 한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 우호주주를 확보하는 대신 고정수수료 지급과 차액보전 리스크를 부담하는 셈이다.
TRS 계약도 거의 유사하다.
계약기간동안 현대상선 지분에서 발생하는 배당금 등의 수익은 모두 현대엘리베이터가 가진다.
만기 차액을 정산할 때 이익이 나면 현대엘리베이터가 모두 갖거나 일정비율(예를 들어 8대2)로 A사와 나누기도 한다. 손실은 무조건 현대엘리베이터가 모두 보전해줘야 한다.
2006년부터 약 10년에 거쳐 현대엘리베이터는 케이프포춘, 넥스젠캐피탈, 메리츠증권, 대신증권, 자베즈PEF 등과 20여건의 파생상품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2010년 당시 정책금융공사가 현대건설 매각에 나선 이후 파생상품계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지분을 8% 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현대건설 인수전은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간 2파전으로 흘렀다. 현대그룹으로서는 현대건설을 현대차에 뺐기면 범현대가가 다시 현대상선 경영권 인수를 노릴 것으로 우려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파생상품계약으로 현대상선 우호지분을 대거 확보한 것이다.
이런 계약들은 만기시점에 현대상선의 주가가 중요했다.
현대상선 주가는 해운경기 침체로 오랫동안 내리막을 탔다. 결과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는 8천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게 된다.
쉰들러는 이에 대해 이사들의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주주로 입성한 것은 지난 경영권 공격에 실패한 KCC로부터 2006년 지분 25%를 사들이면서다.
쉰들러는 애초부터 협력관계보다는 현대엘리베이터 인수를 목표로 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쉰들러는 엘리베이터 사업 인수를 제안했고 현 회장 측과 분쟁을 빚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파생상품 때문에 계속 차액을 보전해주는 상황에 빠지자 2014년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현정은 회장을 포함한 이사들이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해 회사에 손실을 입혔으므로 배상을 하라는 요구였다.
1심은 현 회장측의 손을 들어줬다. 파생상품 계약으로 비록 손실을 보기는 했지만 경영재량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2심에서 뒤집혔다. 재판부는 이사들이 파생상품 계약의 리스크를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마찬가지였다.
현 회장은 2019년 2심 판결 뒤 1천억 원을 현대엘리베이터에 선급금으로 지급하고 200억원의 공탁을 걸었다.
이번 확정판결로 현 회장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약 2700억원이라고 본다면 남은 배상금은 1500억원 가량이다.
일각에서는 현 회장이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나 현대무벡스(코스닥 기업) 지분 대부분이 이미 대출담보로 잡혀있기 때문에 현대그룹 경영권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6일 현 회장은 금융회사에 담보로 제공했던 현대무벡스 지분 20%(860억 원)를 현대엘리베이터에 현물상환키로 했다고 밝혔다.
일단 대출금을 상환해서 담보계약을 해제한 뒤 현대엘리베이터에 주식을 이체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남은 손해배상 잔액은 600억원대로 추정된다. 현대그룹은 앞으로 3개월 내에 전액 갚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자금출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김수헌 코리아모니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