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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 |
팬택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준우 팬택 사장이 이동통신 3사에 출자전환에 참여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한데 이어 팬택 협력사들도 팬택 살리기에 나섰다.
팬택 살리기의 열쇠는 SK텔레콤이 쥐고 있는데 그동안 어려울 때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팬택과 SK그룹의 인연도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60여 팬택 협력사들로 구성된 ‘팬택 협력사 협의회’는 15일 성명서를 내 “팬택 정상화를 위해 팬택으로부터 받아야 할 부품대금의 10~30%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이동통신사들의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오는 17일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T타워 앞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팬택 채권단도 이통사들의 결정만 바라보고 있다. 채권단은 지난 14일이었던 이통사들의 출자전환 동의기한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다만 이통사들이 보유한 1800억 원의 채권을 팬택에 출자전환해야 채권단도 3천억 원을 출자전환하는 등 팬택의 경영정상화를 지원하겠다는 기존 입장은 고수했다.
팬택 협력사들과 채권단 모두 이통사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사실상 칼자루는 SK텔레콤이 쥐고 있다. SK텔레콤은 1800억 원의 팬택 채권 중 절반인 900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 이통사 관계자는 “SK텔레콤이 가장 많은 채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다른 이통사들은 SK텔레콤의 결정에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팬택과 ‘의리’에 발목 잡힌 SK텔레콤
팬택의 생사 결정권을 쥐게 된 SK텔레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미 내부적으로 출자전환 참여 거부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과거 SK그룹이 팬택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음에도 의리를 저버리고 지원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팬택은 2003년 벌어진 ‘소버린 사태’ 당시 SK그룹을 도왔다. SK그룹은 모나코 국적의 자산운용사인 소버린과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소버린은 자회사인 크레스트시큐리티를 통해 SK그룹의 지주사인 SK 지분을 매입해 2대 주주이자 단일 최대주주에 오르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SK그룹은 우호세력을 끌어들여 소버린에 맞섰다. 이 때 SK그룹의 ‘백기사(매수대상기업의 경영자에게 우호적인 인수자)’ 역할을 자처한 곳이 바로 팬택이었다. 팬택은 2003년과 2004년 각각 356억 원과 1천억 원을 들여 SK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 방어를 도왔다.
팬택은 2005년 SK텔레콤이 단말기 제조사업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도 인수자로 나서며 또 한 번 SK그룹을 도왔다. 당시 SK텔레콤은 휴대전화 단말기를 생산하는 자회사인 SK텔레텍을 매각하려 했지만 마땅한 인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SK텔레콤은 정부로부터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 규정돼 각종 규제를 받고 있어 단말기 제조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팬택은 2005년 SK텔레콤이 보유한 SK텔레텍 지분 60%를 3천억 원에 매입한 뒤 SK텔레텍과 합병했다. SK텔레콤은 미래성장이 불투명했던 단말기사업을 처분하며 ‘앓던 이’를 뽑게 됐다. 팬택은 합병으로 SK텔레콤과 피를 섞은 ‘혈맹’이 되면서 SK그룹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팬택과 SK그룹의 처지는 180도 바뀌었다. 팬택은 약자의 입장에서 SK그룹을 향해 회사를 살려달라고 읍소하고 있다. 업계는 팬택의 상거래채권 만기일인 오는 25일이 팬택의 존망을 결정짓는 ‘운명의 날’이 될 것이라고 본다.
SK텔레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실한 회사는 시장에서 퇴출돼야 한다는 것이 시장논리다. 이 때문에 팬택에 대한 ‘동정론’을 앞세워 SK텔레콤을 압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SK텔레콤이 팬택을 지원할 경우 주주들로부터 배임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SK텔레콤의 선택에 2천여 명의 팬택 임직원들과 550곳 8만여 협력사 직원들의 미래가 달려있다. SK텔레콤으로서 팬택에 대한 끈을 쉽게 놓기가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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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택 경영진이 지난 10일 서울 상암 팬택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동통신사와 채권단에 팬택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문지욱 부사장, 이준우 대표이사, 박창진 부사장 <뉴시스> |
◆ 박병엽과 SK는 계속 친밀한 관계 유지
팬택이 존폐위기에 몰리면서 팬택의 창업자이자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 팬택에 박 전 부회장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온다.
박 전 부회장이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그가 팬택과 SK그룹의 오랜 혈맹관계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소버린 사태 당시 팬택이 SK그룹의 백기사를 자처한 것과 SK텔레텍을 인수한 것 모두 박 전 부회장의 작품이었다.
박 전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부회장은 2005년 SK텔레텍 인수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최 회장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전 부회장은 “최 회장은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미래를 읽는 뛰어난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며 친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 전 부회장은 팬택을 떠났지만 SK그룹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박 전 부회장은 지분 100%를 보유한 개인회사인 팬택씨앤아이를 통해 최근 SK하이닉스 자회사인 큐알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큐알티는 반도체 시험인증 전문기관이다. SK하이닉스는 팬택씨앤아이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신규투자가 절실한 팬택으로선 그동안 굵직굵직한 투자를 가져다 준 박 전 부회장이 더욱 그리울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부회장은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전 부회장이 지난 해 9월 팬택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퀄컴과 삼성전자,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유치한 투자금은 2340억 원이나 된다.
특히 박 전 부회장이 지난 해 5월 삼성전자로부터 530억 원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은 업계 전문가들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 승부수로 평가받는다. 스마트폰시장에서 경쟁하는 회사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박 전 부회장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 팬택에 대한 투자를 제안했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이를 승인하면서 투자가 이뤄졌다. 이로써 팬택은 자금난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시 “퀄컴과 삼성은 박 전 부회장만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