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 경쟁사와 달리 아직 메모리반도체 투자 축소 및 비용 감축에 관련한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생산공장. |
[비즈니스포스트]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업황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기업의 사업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잇따라 인력 감축과 투자 축소 등 계획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가 반사이익을 키울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증권전문지 마켓워치는 23일 “메모리반도체 시장에 13년 만에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며 “업황이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메모리반도체 업황은 일반적으로 수 년마다 한 번씩 호황기와 불황기가 반복되는 흐름을 보인다.
호황기가 나타날 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기업이 시설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려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반도체 공급 과잉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과정에서 점유율 하락을 우려한 반도체기업들이 시설 투자를 축소하지 않고 생산량을 유지하는 ‘치킨게임’이 벌어지면서 메모리반도체 불황을 앞당기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최근에는 반도체시장에서 과점체제가 굳어지고 주요 기업들도 시장 점유율보다 수익성을 앞세운 사업 기조를 강화하면서 치킨게임이 벌어지거나 업황이 크게 나빠지는 사례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르면 내년부터 메모리반도체 점유율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나뉘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급격한 업황 악화를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일제히 투자와 사업비를 축소하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는 아직 뚜렷한 대응 방향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켓워치는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과 달리 내년 투자 계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이는 메모리반도체 업황 회복을 늦추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은 최근 콘퍼런스콜에서 세계 메모리반도체 업황이 2008~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며 투자 축소에 더해 약 10%의 인력 감축 계획까지 내놓았다.
SK하이닉스 역시 내년 메모리반도체 투자를 시장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히며 비용 절감을 위해 일부 임직원의 예산을 축소하는 계획도 내놓았다.
두 반도체기업은 세계 D램 및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비교해 낮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그만큼 가격 주도권이 약해 업황 악화에 따른 실적 타격을 더 크게 받는다.
삼성전자 역시 반도체업황 악화에 따른 악영향을 피하기 어렵지만 D램과 낸드플래시에서 모두 압도적 시장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고 있어 경쟁사보다 우수한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다.
결국 메모리반도체 치킨게임 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시설 투자 규모와 반도체 생산 물량을 유지하는 삼성전자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시설 투자를 축소하는 동안 삼성전자가 꾸준한 투자 확대에 나선다면 중장기적으로 점유율을 키워 시장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증권사 코웬은 “삼성전자의 메모리 투자 축소가 없다면 반도체업황 전망은 더 어두워질 것”이라며 “마이크론이 예상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시설 투자 규모는 이미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을 크게 웃돈다.
시장 조사기관 인포메이션네트웍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D램에 모두 155억6700만 달러, 낸드플래시에 128만1600만 달러의 시설 투자를 집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크론의 D램 투자 비용은 70억8100만 달러, 낸드플래시 투자비는 47억2100만 달러고 SK하이닉스의 D램 투자금은 84억7800만 달러, 낸드플래시 투자는 54억1700만 달러로 분석된다.
삼성전자가 이미 두 경쟁사를 합친 것보다 많은 비용을 메모리반도체 시설 투자에 들이고 있는데 내년에는 이 격차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인포메이션네트웍스는 “반도체기업들이 2017~2018년 무리한 투자 확대로 2019년부터 업황 악화를 겪었던 일을 잊어버린 것으로 보인다”며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라고 바라봤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내년 메모리반도체 투자를 축소하지 않는 것은 반도체업황 악화를 주도하는 실수에 그치지 않고 세계시장에서 영향력을 더 키우는 공격적 전략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사이 200단 이상의 3D낸드 및 EUV(극자외선) 공정을 활용하는 미세공정 D램 개발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이런 전략은 더 큰 효과를 낳을 잠재력이 있다.
삼성전자가 최신 반도체기술을 활용하는 생산라인 투자를 경쟁사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집행한다면 고객사들의 신형 메모리반도체 수요에 대응하는 일도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삼성전자도 메모리반도체 업황 악화에 따른 실적 타격을 예상보다 크게 겪게 된다면 내년에 시설 투자 계획을 축소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