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채널Who] 논쟁과 가치 판단, 사회적 갈등 조정과 합의 도출을 위한 사회적 숙의 과정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일임해버리는 세계.
장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가 성신여대 인문과학연구소에 기고한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마치 공상과학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사실상 플랫폼 제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네카쿠라배당토(네이버 카카오 쿠팡 라인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로 대표되는 플랫폼 기업들은 우리 사회를 그들이 만들어놓은 ‘플랫폼 자본주의’ 안으로 한 발 한 발 이끌어가고 있다.
돈만 있다면 집에서 몇 년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옷과 밥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고, 회사에서, 술집에서, 카페에서 그냥 앉은 채로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택시를 호출할 수 있다. 은행에 가지 않아도 손가락을, 얼굴을 스마트폰에 인식시키면 거의 모든 업무를 앉아서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편리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세대인 셈이다.
하지만 과연 이 ‘플랫폼 자본주의’ 끝은 정말 유토피아일까? 우리는 그들이 만들 ‘디스토피아’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과연 이 플랫폼 비즈니스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본질적 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문화적 측면, 경제적 측면의 두가지로 나눠서 플랫폼 비즈니스가,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플랫폼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디스토피아적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위에서 언급했던 장진호 교수는 같은 기고문에서 “이용자들은 편리함과 습관에 의해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찾게 되는데, 동시에 플랫폼 인터페이스의 틀에 의해 이용자의 정동(흥미, 평, 만족, 긴장, 관심, 흥분 등)은 예속되고 관리된다”며 “개인 주체는 플랫폼이 요구하는 데이터 추출과 수집을 위한 알고리즘적 주체로 규격화되어 취급되고 관리되는 ‘기계적 예속’ 상황에 놓여진다”고 바라봤다.
어렵게 느껴지지만 천천히 살펴보면 생각보다 간단한 이야기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플랫폼이 정해주는데로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경제주체, 문화주체로서의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역시 계간 문화과학에 기고한 ‘자본주의 종착역으로서 플랫폼 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적 소묘’라는 글에서 “플랫폼 자본주의는 알고리즘이라는 자동기계를 기업 조직 안팎에 배치함으로써 점점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생략하거나 오염시킨다”며 “현대사회의 소프트웨어화는 인간들의 대중지성과 사회적 논쟁의 과정, 즉 좀 더 복잡한 가치 판단과 사회적 협의가 요구되는 사안까지도 이전보다 훨씬 쉽게 코딩기계에 이관하거나 위임한다 는 점에서 다르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어느새 내 자신의 생각보다 플랫폼의 ‘영리한’ 결정을 더욱 믿게 돼버렸다. 심지어 음식을 시킬 때도, 내가 먹고싶은 것보다 플랫폼이 위에 띄워주는, 주문 수가 많고 별점이 높은 음식을 고르게 되는 때가 적지 않다.
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랫폼의 선택보다 스스로의 선택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계속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플랫폼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반 소비자들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은 경제적 이야기다. 플랫폼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경제적 문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노동의 착취’다.
플랫폼 기업의 노동착취라고 하면 플랫폼 기업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착취란 좀 더 구조적 이야기다.
플랫폼은 이용자의 ‘자유노동’을 양분으로 해서 돌아간다. 자유노동이란 이탈리아의 티치아나 테레노바라는 학자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발적으로 제공됨과 동시에 급여를 받지 않아 착취된 노동을 이야기한다.
인스타그램을 예로 들어본다면 이 자유노동의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사진을 찍어 올리고, 해시태그를 달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이 팔로우를 하고, 또 디엠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활성화되는 플랫폼이다.
여기서 사진을 찍은 이용자, 그 사진을 보고 댓글을 단 이용자들은 모두 콘텐츠를 생산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플랫폼은 그 콘텐츠 생산 노동을 자원으로 해서 돈을 번다. 하지만 플랫폼은 그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편리하기 위해 이용하는 모든 활동이 전부 플랫폼을 위해 ‘노동’하는 활동인 셈이다.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카카오를, 네이버를 위해 계속해서 ‘무급’으로 노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용자들이 즐거움을 얻었으니 괜찮지 않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노동의 댓가로 지불해야 하는 재화는 즐거움이 아니다. 이항우 충북대학교 교수의 ‘정동 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그들은 즐겼으나, 착취당했다”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와 관련해 그 어떤 사람의 불만도 없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축적되다면 사용자가 자유노동을 통해 만들어 낸 데이터 자체에 사용자가 예속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가상현실의 아버지이자 실리콘밸리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제런 러니어는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러한 네트워크 효과는 이용자들에게 보상적인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며 “이용자가 가입된 어떤 플랫폼들의 네트워크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 받게 되는 불이익은 징벌적 네트워크 효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가령 플랫폼은 이용자가 축적한 데이터를 서버에 보관하여 이용자가 서버를 탈퇴할 때 데이터 접근을 막거나 노력이 많이 들게 함으로써 플랫폼에 대한 잠금 즉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플랫폼은 이용자에게서 착취한 노동의 결과인 데이터를 활용해 큰 돈을 벌면서 이용자에게는 그 어떠한 댓가도 지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데이터를 그대로 사용자를 예속, 좀 더 중립적 단어로 표현하자면 ‘락인’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소위 ‘플랫폼 자본주의’가 불러올 수 있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플랫폼 사회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플랫폼 비즈니스 덕분에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로 편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결국 플랫폼 비즈니스라는 것은 이용자에게나, 기업에게나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이 도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플랫폼 기업이라고 볼 수 있는 카카오는 이 플랫폼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다음 영상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