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으로서는 지난해까지 러시아에 적극적 투자를 이어온 만큼 다른 완성차 브랜드들과 달리 철수에 대한 비용부담이 크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최근 한국과 러시아 관계도 경색되면서 철수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러시아 자동차시장에서 현대차그룹을 제외하고 사실상 글로벌 브랜드가 남아있지 않아 현대차그룹도 철수와 관련한 압박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1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전쟁에 따른 경제 제재로 자재 조달이 안 되는 러시아 자동차시장에서 대부분 글로벌 브랜드가 철수하면서 현대차그룹도 공장 철수를 놓고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러시아에 남은 해외차 브랜드들 대부분이 중국 브랜드라는 점을 고려하면 남은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는 사실상 현대차그룹이 유일하다.
미국 자동차업체 포드는 현지시각 10월26일 2022년 3분기 경영실적 발표에서 러시아 합작회사 지분 49%를 매각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메르세데스-벤츠도 러시아 최대 자동차 제조사인 아브토바즈에 자회사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포드는 현재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면 콜옵션 행사를 통해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옵션을 달아 매각했다는 점에서 현대차로서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러시아 공장 철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들은 포드가 러시아 합작법인 지분을 매각하면서 글로벌 상황이 바뀔 경우 5년 이내에 콜옵션 행사를 통해 해당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선택지를 포함해 매각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러시아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했던 성과가 막 나타나던 있던 시점에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터져 공장 철수를 놓고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현대차러시아생산법인(HMMR)은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러시아 내수에서 자동차를 1대도 판매하지 못한 것으로 집계됐다. 앞서 6월에도 단 1대만 파는데 그쳤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기 이전인 올해 1월과 2월에 현대차는 러시아 내수시장에서 각각 1만5762대, 1만4817대씩 판매한 것과 대조된다.
현대차의 2021년 러시아 시장에서 브랜드별 완성차 판매점유율은 10.7%였고 기아는 13.1%를 차지해 합산 점유율이 23.8%에 이른다.
이는 같은 기간 러시아 자국 자동차브랜드 LADA의 점유율(22.3%)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러시아는 현대차그룹에 떠오르는 시장이었다.
더구나 러시아의 연간 자동차시장 규모도 지난해 기준 157만 대 수준으로 같은 기간 169만 대가 판매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어서현대차그룹의 기대감은 매우 컸다.
그 때문에 현대차는 GM이 러시아 철수를 결정할 때도 GM의 러시아 공장을 인수하면서 러시아 시장 공략을 강화하는 전략을 폈다.
현대차는 2020년 12월 미국 GM(제너럴모터스)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인수한 이후 올해부터 가동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이뿐 아니라 부품 계열사 현대위아도 러시아에 엔진공장을 설립하면서 그룹 차원의 러시아시장 공략을 추진해왔다.
현대위아는 2021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공장 준공식 자리에서 올해부터는 2천cc 엔진을 추가해 연간 33만 대 규모의 엔진 생산능력을 갖추겠다는 목표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정세가 경색되면서 현대차그룹은 러시아 철수 문제를 놓고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월27일(현지시각) 열린 국제 러시아 전문가 모임 발다이 클럽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한국을 직접 지목하면서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기로 했다”며 “무기를 공급하면 한국과 러시아 관계는 파탄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겨냥한 만큼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긴장감이 높아질 공산이 크다. 자칫 르노나 닛산처럼 현대차그룹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산을 몰수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포드 등과 달리 러시아에만 계열사 포함 18개 법인을 두고 있다. 게다가 철수 뒤 재진입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는 점에서 러시아에서 발을 빼기가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가운데 러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현대차러시아생산법인의 2022년 6월 기준 총자산 가치만 따져봐도 2조6189억 원에 이른다.
만약 현대차그룹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게 되면 이들 자산 가운데 상당 부분이 메몰비용으로 처리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준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이 빠르면 올해 4분기 늦어도 내년 1분기에 러시아 사업과 관련해 결정을 내릴 것으로 전망한다”며 “잠재적으로 러시아와 관련한 비용 발생 가능성은 실적 전망에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기업가치를 하락시킬 수 있다”고 바라봤다. 장은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