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 개발이 확대되면서 제약바이오를 포함한 다양한 산업이 우주에 진출하고 있다. 사진은 미세중력 제조환경이 구축되는 상업용 우주정거장 '오비탈리프'. <블루오리진 유튜브 영상 갈무리> |
[비즈니스포스트] 인류가 달을 넘어 화성 진출을 준비하는 시대다. 그동안 지표면에 한정돼 있던 다양한 산업 분야의 물리적인 영역이 우주로 확장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주와 관련이 적어 보이는 제약바이오 분야도 마찬가지다. 중력이 약한 미세중력(무중력의 바른 표현)을 이용해 차별적 제조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뤄지는 중이다.
3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미국 우주항공 인프라기업 레드와이어는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와 협력해 우주공간에서 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 ‘필-박스(PIL-BOX)’를 테스트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필-박스는 ‘우주 제약 실험실-생체 결정 최적화 실험(The Pharmaceutical In-space Laboratory – Bio-crystal Optimization Xperiment)’의 약자다. 단백질 기반 의약품 제조, 단백질 구조 분석 등에 활용되는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장치다.
일라이릴리는 필-박스를 활용해 당뇨병 및 심혈관 질환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구보다 양질의 단백질 결정을 얻음으로써 의약품 연구개발에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깔렸다.
미세중력 환경이 단백질 결정 제조에 유리하다는 사실 자체는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별세한 이규정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가 2001년 ‘공학교육과 기술’ 저널에 기고한 ‘미세중력 응용 연구’를 보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1981년 첫 우주왕복선을 발사한 뒤 미세중력 환경에서 생물공학, 연소과학, 유체역학, 기초물리학, 재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응용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여기에는 단백질 결정 성장에 대한 연구가 포함됐다.
무수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해석해 의약품 개발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의 성장을 연구해야 한다. 결함이 적고 큰 단백질 결정을 확보할수록 연구가 수월해진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순수한 단백질 결정을 일정 크기 이상으로 성장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중력에 의한 부력과 대류, 침전현상 등으로 단백질 결정 성장이 억제되고 결함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미세중력에서는 대류에 의한 유동이 크게 억제되므로 결정체 성장이 훨씬 안정된 환경에서 이뤄져 구조적 배열이 개선된다”며 “침전현상이 없어 단백질 결정 공정시 사용되는 용기의 밑바닥에 쌓이지 않아 양질의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1세기 들어서도 비슷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ISS) 미국국립연구소는 2019년 미국 톨레도대학 연구진과 협력해 단백질 결정화 연구를 추진했다. 이는 암, 심장 및 간 질환 등의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일라이릴리의 구상과 일치한다.
다만 일라이릴리·레드와이어의 협업은 그동안 당국 주도로 진행되던 연구와 별개로 민간기업이 앞에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제약바이오기업이 기업별 특성에 알맞게 미세중력 환경 응용 연구를 독자적으로 설계, 진행할 수 있게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은 우주산업의 진입장벽이 초기와 비교해 대폭 낮아졌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설립한 스페이스X를 비롯한 민간기업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면서 관련 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미국 항공우주국이 우주왕복선을 사용했을 때는 1kg을 저궤도(LEO, 고도 2천 km까지)로 운송하기 위해 5만4500달러를 들여야 했다. 그러나 스페이스X는 재사용 가능한 우주발사체를 활용함으로써 2018년 기준 저궤도 발사 비용을 1kg당 2720달러로 낮췄다.
미세중력 활용이 이뤄지는 기반 자체에도 민간기업의 손길이 닿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은 2029~2030년 퇴역 예정인 국제우주정거장을 민간 주도의 상업용 저궤도 목적지(CLD)로 전환하기 위해 여러 기업과 협력하는 중이다. 블루오리진·시에라스페이스, 나노랙스, 노그롭그루먼, 액시엄스페이스 등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새로 조성되는 우주 시설들은 미세중력 기반 제조환경을 구축해 제약바이오기업을 포함한 여러 산업 분야를 유치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소개한 단백질 결정 성장 이외에도 다양한 미세중력 응용방안이 준비되고 있다.
액시엄스페이스가 개발하는 상업용 우주정거장 ‘액시엄스테이션’의 경우 내부에 바이오 인공장기 제조를 위한 3D 프린팅 서비스, 망막 임플란트 제조 서비스 등을 갖출 것으로 예정됐다.
현재 생체 재료를 활용한 3D 바이오 프린팅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뼈 같은 단단한 조직이 아닌 혈관, 근육 등을 조립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생체 재료를 쌓아올려도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세중력에서는 보다 연약한 조직의 구축이 가능해 3D 바이오 프린팅의 활용도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망막 임플란트 제조도 마찬가지로 미세중력 환경에서 제조 결함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