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나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할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중국 기업은 세계무대에서 다방면에 걸쳐 우리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기업이라도 이들을 이끄는 핵심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기업의 경쟁상대인 중국 기업을 이끄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경영전략과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다. <편집자주>

노녕의 중국기업인탐구-화웨이 런정페이
[1]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
[2] 화웨이 러시아시장 위기를 기회로 
[3] 무선통신 시대 개막에 본격 성장
[4] 중국과 미국 갈등 속 생존의 길 찾다

화웨이는 러시아 통신장비시장에서도 1위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를 향한 서방의 경제제재가 본격화되면서 화웨이의 선택도 주목받고 있다.

런정페이는 사업 초기부터 중국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미국 통신장비시장을 직접 보고 경쟁력 있는 자체 제품생산에 눈을 떴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러시아 시장 진출을 시작으로 글로벌로 사업영토를 빠르게 넓혀 화웨이의 글로벌 도약을 이끌었다.
 
[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화웨이 런정페이(2) 러시아 위기를 기회로

▲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가운데). < AP >


화웨이가 러시아에 처음 진출할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러시아 화폐인 루블화 가치가 폭락했던 시기다.

러시아를 장악하고 있던 서방 통신장비 대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하는 등 러시아 경제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던 당시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모두가 위기라고 한 목소리를 낼 때 런정페이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낼 줄 아는 승부사 기질을 보인 기업인이다.   

◆ 49세 처음 중국을 벗어나 새로운 눈을 뜨다 

1983년 중국정부가 인프라공정병 사단을 모두 소집해제하면서 런정페이도 군복을 벗었다. 인프라공정병 특성상 군대 계급장은 퇴임하는 순간까지도 없었다.

런정페이는 군복을 벗고 당국으로부터 국유기업 선전난하이석유그룹 산하에 있는 작은 자회사의 부사장으로 배정받았다. 4년 뒤인 1987년에 회사를 나오면서 2만1천 위안의 자금을 겨우 모아 화웨이를 세웠다.                                                                                    
화웨이 사업 초기에 런정페이는 유선전환기에 사용되는 교환기를 대리판매하는 사업을 이어갔다. 그러다 취급하는 제품의 고장이 자주 발생하자 자체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런정페이가 49세에 처음으로 중국을 벗어나 미국에 방문했을 때 선진국 통신장비시장의 현황을 확인해 경쟁력 차이를 실감한 점도 화웨이에서 자체 제품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데 한몫을 했다.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에서 화웨이가 주요 기업으로 자리를 차지하려면 결국 경쟁력 있는 자체 제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런정페이는 이를 위해 상하이우정통신연구원에 소속돼 있던 교환기 전문가 주진캉을 총괄엔지니어로 데려왔다. 

중국은 9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통신망을 모두 수입해 사용했는데 주진캉은 연구원에서 정부가 수입하는 교환기의 통화품질이나 수신 안정성을 테스트하는 총괄 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진캉 덕분에 화웨이는 1년 만인 1993년에 C&C08교환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1996년에는 대형 유선통신장비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C&C08교환기는 외국산 제품과 비교해 품질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절반 이하로 저렴해 중국 내수 농촌을 집중적으로 개척한 것이 효과를 봤다.

1995년 화웨이의 연간 매출은 15억 위안에 이르렀고 대부분이 농촌에서 창출됐다. 화웨이는 같은 해 지적재산권 부서와 베이징연구개발센터를 신설해 연구개발에 더 집중했다.

1996년에는 유선인터넷 솔루션을 제공하는 계약으로 홍콩에 진출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갈 토대를 마련했다.

◆ 러시아 공략 발판 삼아 글로벌 통신시장 도약

1996년 화웨이는 홍콩시장에 진출한 뒤 같은 해 러시아 시장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개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2년 전인 1994년부터 러시아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소형기업에 불과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 통신업체는 서방 대기업만 신뢰하고 있어 화웨이 관계자와 만나는 것조차 거절했다.

결국 런정페이는 직접 러시아에 방문했지만 빈손으로 귀국했다. 당시 제8회 러시아 정보통신박람회에 참석해 중국 기업에 보내는 불신과 냉대를 직접 겪었다. 화웨이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 기업들이 홀대를 받던 시절이었다.

다음해인 1997년에는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러시아 화폐인 루피화 가치가 폭락했고 러시아를 장악하고 있던 서방 통신장비 대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했다. 

작은 러시아지사 사무실을 두고 있던 화웨이 사정은 더욱 어려웠지만 버티다가 1999년 러시아 현지 통신사와 첫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이 합자회사는 38달러(4만6천 원)에 불과하지만 첫 계약을 수주하는 데도 성공했다.

화웨이의 러시아 합자회사는 점차 신뢰를 쌓으며 2001년 매출 1억 달러(1218억 원)를 돌파했다. 그 뒤로 2004년에는 4억 달러(4870억 원), 2005년에는 6억1400만 달러(7475억4500만 원)를 보이며 해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러시아를 공략하는 사이 인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등 동남아에도 진출했고 2000년 대에 들어서는 중동과 아프리카도 넓혀갔다.

2002년 화웨이는 해외시장 매출액만 연간 5억5200만 달러(6720억6천만 원)를 올리며 글로벌 통신장비기업으로 도약의 발판을 구축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노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