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길거리에서, 옥상에서, 지하철에서 한 여성이 춤을 춘다. 

신한라이프 광고의 한 장면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은 우리가 알고있는 ‘사람’이 아니다. 가상세계에만 존재하는 ‘가상인간’이다. 
  
사이버가수 '아담'부터 가상인간 '로지'까지, 어디까지 진화해 나갈까

▲ 신한라이프 광고에 출연한 가상인간 로지. <신한라이프 유튜브 갈무리>


최근 가상인간들의 활약이 대중문화, 광고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싸이더스 스튜디오엑스에서 제작한 가상인간 로지는 올해에만 약 10억 원 수준의 광고료를 받았다.

디오비스튜디오에서 만든 가상 유튜버 루이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국내 유명명소를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미국의 스타트업 브러드에서 제작한 가상인간 모델 릴 미켈라는 프라다, 샤넬, 루이비통 등 세계 패션업계를 주도하는 명품 브랜드들의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가상모델 이마는 아디다스, 이케아 등 글로벌 브랜드의 일본 내 홍보모델이다.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가상인간의 어디에서 출발해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그리고 가상인간기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 세계 최초의 가상인간 다테 쿄코, 아담과 류시아가 ‘롱 런’하지 못한 이유

대중문화업계에서 활약한 세계 최초의 가상인간은 일본의 연예기획사 호리프로에서 1996년 ‘데뷔’한 다테 쿄코다. 호리프로는 게임 내 여성 캐릭터들이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던 점에 착안해 다테 쿄코의 데뷔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일본에서 인기가 시들해져가던 다테 쿄코는 당시 한국에 불고 있던 일본 대중문화 개방 바람을 타고 ‘디’라는 예명으로 한국에 진출했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이미 국내에서는 1998년에 데뷔한 남자 사이버가수 ‘아담’과 여자 사이버가수 ‘류시아’가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아담의 모델링은 아담소프트에서, 류시아의 모델링은 현대인포메이션에서 맡았다.
사이버가수 '아담'부터 가상인간 '로지'까지, 어디까지 진화해 나갈까

▲ 세계 최초의 사이버가수 '다테 쿄코'.



하지만 다테 쿄코와 마찬가지로 아담과 류시아의 인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담과 류시아는 모두 1999년 2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초창기의 가상인간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이유는 수익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담과 류시아를 만드는 데 사용되던 모션 캡처기술은 당시로서는 최첨단기술이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인력이 필요한 기술이었다. 아담이 몇 분 동안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은 1억 원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창기 가상인간을 사람들이 외면했던 데에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도 한몫 했다.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란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제시한 이론으로 로봇 등이 인간을 아예 닮지 않았을 때보다 어설프게 인간을 닮았을 때 대상을 향한 혐오도가 거꾸로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따르면 초창기 가상인간인 아담이나 류시아는 인간을 닮기는 했지만 ‘어설프게’ 닮았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셈이다.

◆ 세계 패션계를 강타한 릴 미켈라와 유튜브 5억 뷰의 ‘K/DA’, 가상인간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가상인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2016년이다. 미국의 스타트업 브러드는 2016년 세계 최초의 가상모델 ‘릴 미켈라’를 탄생시켰다. 

가상인간 릴 미켈라는 LA 거주, 중국인 남자친구 등의 ‘콘셉트’에 맞는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인지도를 높여갔고 현재는 프라다, 루이비통, 샤넬 등 글로벌 패션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릴 미켈라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올해 11월 기준 310만 명에 이른다. 
 
사이버가수 '아담'부터 가상인간 '로지'까지, 어디까지 진화해 나갈까

▲ 가상인간 릴 미켈라(가운데)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릴 미켈라의 성공 이후 세계적으로 가상모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17년 영국의 사진작가 캐머런 케임스 윌슨이 만들어낸 슈두, 2018년 일본의 스타트업 AWW가 선보인 이마 등이 대표적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8월 탄생한 오로지를 시작으로 삼성전자의 샘, LG전자의 김레아 등의 가상인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릴 미켈라, 슈두 등이 패션계를 겨냥해 인위적으로 탄생한 가상인간이라면 이미 존재했던 캐릭터에 인격을 부여해 탄생하는 가상인간도 있다.

유명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여성 캐릭터들로 구성된 걸그룹 ‘K/DA’가 대표적 사례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개발사 라이엇게임즈는 2018년 11월 유튜브에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기 캐릭터인 아리, 이블린, 카이사, 아칼리를 멤버로 하는 걸그룹 K/DA의 첫 번째 뮤직비디오 ‘POPSTARS’를 공개했다.
 
사이버가수 '아담'부터 가상인간 '로지'까지, 어디까지 진화해 나갈까

▲ 루이비통 광고모델로 등장한 게임 '파이널판타지'의 인기 캐릭터 라이트닝.


이 영상은 공개 31일 만인 같은 해 12월4일 1억 뷰를 돌파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K/DA는 올해에도 객원 멤버인 세라핀을 영입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글로벌 패션회사 루이비통은 2016년 게임 ‘파이널판타지’의 캐릭터인 ‘라이트닝’을 광고모델로 등장시키면서 세계 패션업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라이트닝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가상인간으로서 세계 유명 패션잡지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 가상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을까, ‘성 상품화 논란’과 ‘인공지능’

그렇다면 가상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을까? 

가상인간의 진화 방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현재 가상인간을 향해 제기되고 있는 비판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가상인간이 받고 있는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성 상품화’, ‘실체’와 관련된 논란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가상인간은 릴 미켈라, 슈두, 로지, 루이, 샘, 래아 등 거의 모두가 여성이다. 

업계에서는 가상인간이 대부분 여성인 이유를 ‘친근감’에서 찾고 있다. 소비자들이 여성 가상인간을 남성 가상인간보다 더욱 친근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가상인간마저도 여성을 ‘성 상품화’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해외 네티즌들이 삼성전자의 가상인간 ‘샘’을 성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국내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이런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 성별이 없는 ‘무성’ 가상인간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무성 챗봇 메나, 블렌더를 각각 개발했다. 국내 스타트업 스캐터랩이 개발했던 챗봇 ‘이루다’가 여대생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각종 성적 대상화 논란에 휩쌓여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사이버가수 '아담'부터 가상인간 '로지'까지, 어디까지 진화해 나갈까

▲ 성적 대상화 논란으로 결국 서비스가 중단된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 '이루다'.



가상인간이지만 그 실체는 실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점 역시 현재 가상인간들의 약점 가운데 하나다.

가상인간들은 마치 가상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과 사진을 올리지만 그 사진과 글을 작성하는 것은 대부분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이런 이유로 가상인간이 예전부터 인터넷에 존재하던 ‘아바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IT(정보기술) 업계에서는 이런 비판과 관련해 인공지능(AI) 기술을 가상인간에게 적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가상인간에게 적용되면 가상인간은 그 가상인간을 통제하는 실제 인간이 없이도 가상세상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정보기술업계의 한 관계자는 “별도의 운영팀 없이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주도적으로 글을 올리거나 답글을 달고, 심지어 인터뷰까지 진행하는 가상인간이 곧 개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