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과 네덜란드 정상회담을 계기로 네덜란드 반도체장비기업 ASML과 협력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생산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앞으로도 고도화된 공정에서 수준 높은 반도체를 생산해 경쟁사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ASML을 탄탄한 우방으로 만들어야 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반도체 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 수월해지나

▲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6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7일로 예정된 한국과 네덜란드 온라인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한 협력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ASML의 주력제품인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논의의 중심에 놓일 공산이 크다.

청와대가 회담에 앞서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5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최근에는 반도체, 신재생에너지 등 미래산업분야에서 협력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며 “네덜란드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등 반도체장비 생산 강국으로 우리나라의 반도체 제조 강점을 접목시켜 안정적 공급망을 구축하는 등 상호 보완적 협력을 추진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정상회담의 주제로 시사한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기업에게 의미가 작지 않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사업에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해 오다 최근에는 메모리반도체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올해부터 극자외선 기반 메모리반도체 양산에 들어갔다.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다른 글로벌 반도체기업들도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대만 TSMC, 인텔, 마이크론 등이 대표적 극자외선 노광장비 수요처로 꼽힌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원하는 곳은 많지만 생산량은 한정돼 있다. ASML은 지난해 극자외선 노광장비 31대를 공급했는데 올해는 40여 대를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반도체기업들의 극자외선 노광장비 쟁탈전이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반도체 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 수월해지나

▲ ASML 직원들이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조립하고 있다. < ASML >


세계적으로 ‘반도체 지역주의’가 확산하고 있다는 점도 정부 차원에서 극자외선 노광장비 등 첨단 반도체장비 공급망과 관련한 지원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미국과 유럽 등이 앞다퉈 자체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를 꾀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선두기업이 앞으로도 해외 반도체 고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기반으로 ‘반도체기술 초격차’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아니어도 ASML은 글로벌 반도체산업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ASML은 전체 노광장비분야 시장 점유율 8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노광장비는 웨이퍼에 빛으로 회로를 그리는 노광공정에서 사용된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기존 빛보다 훨씬 파장이 짧은 극자외선을 활용해 나노미터(nm) 단위의 미세한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5월 정부의 K-반도체 전략 발표 당시 “반도체는 이제 중요한 정도를 넘어 미국과 중국 패권경쟁의 핵심 전략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명분론보다는 정부의 전략적 의사결정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ASML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존 반도체기업과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반도체업계에서는 중국 반도체산업을 견제하는 미국 정부의 영향으로 ASML의 중국 수출이 제한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ASML의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SMIC를 비롯한 중국 반도체기업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제재해 왔다. 앞으로는 이런 제재가 더 강화될 수도 있다.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보다 더 많이 쓰이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3월 미국 의회에 제출했다.

1분기 기준 ASML 매출 15%는 중국에서 나왔다. ASML로서는 중국 수출길이 끊어질 때를 대비해 다른 지역의 반도체장비 고객사와 관계를 탄탄히 하는 일이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번 정상회담을 기반으로 ASML과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기반으로 양산되는 반도체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제품은 회로 폭이 5나노에 불과하다. 5나노는 머리카락 두께의 1만 분의 1 정도다.

이처럼 미세한 회로는 반도체사업의 경쟁력과 연결된다. 반도체는 회로가 미세할수록 성능과 소비 전력 등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나노 반도체는 7나노 반도체와 비교해 칩 면적 25% 축소, 전력효율 20% 개선 등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물론 수 나노 단위의 미세공정에서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이외에도 고도의 반도체기술이 필요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와 TSMC만이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했다. 5나노 반도체 역시 삼성전자와 TSMC에서만 생산된다.

다만 최근에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요구하는 반도체기업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당초 파운드리사업 등 시스템반도체분야에서만 활용됐던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D램을 비롯한 메모리반도체 쪽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반도체 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 수월해지나

▲  펫 갤싱어 인텔 CEO가 IDM2.0 계획을 발표하며 극자외선 기반 7나노급 공정을 소개하고 있다. <인텔 유튜브 갈무리>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가 극자외선 기반 메모리반도체의 첫발을 뗐다. 지난해 8월부터 평택 사업장에서 처음으로 극자외선 공정을 적용한 16Gb LPDDR5 모바일 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도 첨단 메모리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도입했다. 올해 초 준공한 이천 M16공장에서 하반기부터 4세대 10나노급(1α) D램 제품을 생산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마이크론도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2024년부터 반도체 생산에 적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3대 D램 생산업체가 모두 극자외선 공정에 뛰어드는 셈이다.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극자외선 노광장비 수요도 당분간 지속해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세계 극자외선 노광장비의 50% 이상을 확보한 TSMC는 앞으로 첨단공정을 확대하면서 장비 보유량을 늘려갈 것으로 전망된다.

인텔은 2023년 극자외선 기반 7나노 공정에서 중앙처리장치(CPU)를 비롯한 자체 반도체를 생산할 것으로 예정됐다. 새로 진출하는 파운드리사업에 관해서도 극자외선 공정 도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파운드리기업 SMIC 역시 미국 정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를 꾸준히 시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