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생명은 (산업은행이) 애당초 인수하지 말았어야 할 회사다. 인수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상태였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2018년 말 국회 국정감사에서 작심하고 과거 산업은행의 KDB생명 인수 결정을 이렇게 정면으로 비판한 뒤 책임감이 없는 태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산업은행이 2010년 경영 위기에 놓인 금호생명을 떠안아 KDB생명으로 이름을 바꾼 뒤 막대한 자금지원에도 경영 정상화에 사실상 실패한 점을 이전 회장들의 잘못으로 떠넘겼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KDB생명과 같은 기업을 채권단 관리체계로 계속 이끌어갈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인정하며 KDB생명 매각을 밀어붙인 성과를 마침내 눈앞에 두게 됐다.
산업은행이 이 회장체제에서 여러 기업을 매각해 경영에서 손을 떼고 KDB생명 매각을 통해 금호그룹과 질긴 악연의 고리도 마침내 끊어내면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산업은행은 31일 사모펀드 JC파트너스에 KDB생명 지분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
지분 매각가격은 2천억 원으로 결정됐는데 그동안 산업은행이 KDB생명 인수에 들인 금액과 유상증자에 쓴 자금이 1조 원에 가까운 점을 고려하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결정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KDB생명 매각을 2020년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는데 JC파트너스와 협상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2019년 국정감사에서 KDB생명 매각 적정가를 최고 8천억 원까지 보고 있다고 말했고 경영진에게 KDB생명 매각 성사를 조건으로 수십억 원 규모 성과급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 회장이 KDB생명 몸값을 대폭 낮추면서까지 매각을 추진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산업은행이 그동안 채권단 관리체계로 끌어안고 있던 여러 자회사를 정리하는 데 속도를 내는 상황이고 금호그룹과 10년 넘게 이어진 악연과도 결별하기 위한 것이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경영위기에 놓인 기업을 지원하면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직접 경영진도 선임해 운영을 담당하는 관행을 두고 부정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산업은행이 재무적 구조조정은 잘 하지만 영업력과 기업가치 제고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적도 있다.
실제로 KDB생명도 산업은행 관리체계에서 재무구조 악화로 여러 차례 위기에 놓이면서 영업력을 키우지도 못해 기업가치가 크게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도 자주 받았다.
산업은행이 KDB생명을 인수해 매각하기까지 큰 손실을 본 만큼 이 회장으로서는 산업은행이 지원대상 기업 경영에는 손을 떼겠다는 결심을 더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채권단 관리체계로 경영을 도맡는 일이 혈세 낭비로 이어지고 산업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하기 어렵다는 원칙을 앞세워 올해까지 아시아나항공과 한진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굵직한 기업들의 매각을 성사하는 데 속도를 냈다.
KDB생명 매각을 계기로 산업은행과 금호그룹 사이 관계도 대부분 정리됐다.
산업은행은 2009년 경영위기에 놓인 금호그룹에서 KDB생명 외에도 대우건설과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 등을 떠맡아 지원하게 됐다.
이후 금호그룹에서 떠안은 기업들이 경영 정상화에 고전하면서 산업은행에 오랜 기간 ‘아픈 손가락’으로 남게 됐는데 이 회장체제에서 정리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금호타이어는 2018년 중국 더블스타에 매각이 마무리됐고 대우건설은 구조조정 자회사 KDB인베스트에 넘어갔으며 아시아나항공과 KDB생명은 모두 최근에 새 주인을 찾았다.
KDB생명과 대우건설, 아시아나항공 매각은 모두 여러 차례에 걸친 시도와 무산 끝에 성사됐고 금호타이어도 매각 불발 등 위기를 넘었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마침내 금호그룹에서 떠안은 기업들을 해결했다는 데 후련함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산업은행이 세금을 들여 지원한 KDB생명을 매각하며 막대한 손해를 본 것은 물론 JC파트너스에 KDB생명 매각을 확정짓는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는 오점이 남아 있다.
JC파트너스가 투자자 확보에 고전하면서 매각계약 체결을 계속 늦췄는데 산업은행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특혜를 제공했다는 논란도 고개를 들었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무리해서라도 KDB생명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증명하는 과제를 새로 안게 됐다.
산업은행이 2021년부터 한국판 뉴딜 지원을 강화하고 녹색금융 공급 비중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만큼 KDB생명 매각으로 확보한 자금이 이런 분야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