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Who
KoreaWho
정치·사회  정치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김시대' 저물다

조은아 기자 euna@businesspost.co.kr 2015-11-22 16:14:26
확대 축소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X 공유하기 네이버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유튜브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 인쇄하기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김시대' 저물다  
▲ 김영삼(왼쪽)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양김 시대'로 대표되던 한 시대가 저물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88세로 22일 서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전 전 대통령까지 사망하면서 현대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던 ‘양김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영원한 맞수이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는 두 사람에 대해 ‘물과 기름’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계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 병상에 누워있을 때 병문안한 자리였다.

◆ 함께 민주화 이끈 동지이자 영원한 맞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남권을 대표하는 민주화의 리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권의 정치거물로 각각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자유당 공천을 받아 25세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이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은 1955년 4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 뒤 야당인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통했다.

두 사람은 한국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중대한 정치적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갔다. 1970~1980년대 군사정권시절 반독재 투쟁을 국내외에서 이끌었고, 역사상 최초로 여야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25여 년 동안 모두 4차례 정면대결을 펼쳤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1970년 대선후보 경선,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맞붙었다.

첫 번째 대결이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승리였다.

그 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다시 한 번 맞붙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수락 연설문까지 작성해 놓았을 정도로 압승을 예상했지만 역전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고 결과에 승복했고 그 뒤 유신반대 투쟁도 함께 나섰다.

두 사람은 1980년 신군부의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미국으로 망명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 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1983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고,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두 사람은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배했다.

당시의 패배로 민정당 정권이 다시 집권하면서 군사정부가 연장되자 야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뒤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일에 대해 “천추의 한”이라고 표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며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밝혔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김시대' 저물다  
▲ 1992년 6월12일 민자당 김영삼(가운데), 민주당 김대중(오른쪽), 국민당 정주영(왼쪽) 대표 등 3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회담을 갖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 3당합당으로 돌아올수 없는 강 건너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3당으로 전락하자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자당과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정했다.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 뒤 집권당이던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됐고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숙명의 대결을 벌여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 두 사람은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먼저 눈을 감기까지 22년 동안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

두 사람이 모두 대통령직을 마친 뒤에도 불편한 관계는 이어졌다. 서로를 공개석상에서 배신자로 불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자 이를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화해한 건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재진들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며 “그럴 때가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공헌에도 불구하고 영남과 호남의 지역분열과 보스 중심의 정치, 계파갈등 등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도 키웠다는 비판도 받는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

최신기사

법원, 우리금융 '부당대출' 혐의 전 회장 손태승 구속영장 재차 기각
경찰, 국방부·수방사 압수수색해 전 국방장관 김용현 '비화폰' 확보
하나은행장에 이호성 하나카드 사장, 하나증권 강성묵 사장 연임, 하나카드 사장에 성영수..
야당 6당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두번째 제출, 14일 오후 5시 표결
신한은행 38세 이상 직원 대상 희망퇴직 받아, 특별퇴직금 최대 31달치 임금
우리은행 고강도 인사 쇄신, 부행장 줄이고 70년대생 발탁해 세대교체
이부진 포브스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85위, 네이버 최수연 99위
메리츠화재 김중현 이범진·메리츠증권 김종민 사장 승진, "경영 개선 기여"
미국 생물보안법안 연내 통과되나, 외신 "예산 지속 결의안에 포함 땐 가능"
국회 내란 특검법안과 김건희 특검법안 가결, 국힘 반대 당론에도 이탈표 나와
koreawho

댓글 (0)

  •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 저작권 등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댓글은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등 비하하는 단어가 내용에 포함되거나 인신공격성 글은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삭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