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황제' 이길여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의 여러 수식어 가운데 하나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012년 세계 주요 여성 150인에 이 회장을 선정했다. 한국에서 4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한 명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이 회장은 박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이 회장의 사업영역은 넓다. 그의 사업영역에 병원을 비롯해 대학과 언론도 있다. 그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지난해 벌어들인 돈만 해도 3800억 원이 넘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맨주먹으로 이뤄냈다.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은 조선 정조 때 제주 거상이었던 김만덕에 비견된다. 자수성가한 여성사업가인 데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김만덕은 정조가 신하들에게 시험을 보면서 그의 일생을 주제로 내걸고 ‘만덕전’을 지으라고 할 정도로 칭송받던 인물이다. 김만덕은 그가 벌어들인 돈만으로 평가를 받은 게 아니다. 그는 제주도민이 기근에 시달릴 때 재산을 털어 쌀을 구입해 배곯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김만덕이 위대한 것은 최후까지도 이런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는 1812년 74세로 숨질 때 남은 재산을 골고루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후계자인 양아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적은 재산만 남겼다.

이 회장의 삶에도 김만덕의 그런 모습이 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 가천문화재단을 세운 뒤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그는 “나눔과 봉사의 정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라며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앞장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올해 83세다. 이 회장은 2010년 “남는 재산이 있다면 남김없이 모두 재단에 귀속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제2의 김만덕이 될 수 있을까?

◆ ‘여자황제’ 이길여의 여러 얼굴

이 회장은 여러 얼굴의 소유자다. 의사에서 출발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의료분야에서 최고의 경영자에 올랐다. 그러나 그 얼굴이 전부는 아니다. 대학총장이자 언론사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자황제’ 곧 여제라고 불린다. 가천길재단을 통해 의료, 교육, 사회문화, 언론, 봉사 등 5개 분야 사업을 맹렬히 펼치고 있다.

이 회장은 최고의 부자의사다. ‘부자학’을 가르치는 한동철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자의) 기준을 물질에만 두면 의사중에 이길여 여사를 빼고 누가 부자겠느냐”고 말했다.

의료분야에서 이 회장은 길의료재단 산하의 종합병원과 의료시설를 구축하고 있다. 가천대길병원을 비롯해 가천대부속 동인천길병원, 남동길병원, 산업의학연구소, 철원길병원, 양평길병원, 가천대부속 길한방병원 등이 재단 소속이다.

길의료재단은 지난해 3844억 원의 수입을 기록했다. 보유재산이 장부가치로 3916억 원에 이른다.

이 회장은 대학총장이다. 교육분야는 이 회장이 요즘 가장 힘을 쏟는 분야다.

이 회장은 가천대 총장을 맡고 있다. 이 회장은 가천의대와 경원대를 통합해 가천대를 출범시키면서 “앞으로 10대 사학을 넘어 5대 사학으로 도약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가천대는 성남의 글로벌캠퍼스와 인천의 메디컬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다. 인천의 신명여고도 운영한다.

이 회장은 신문사 사주다. 그는 1999년 8월 경인일보를 인수했다. 경인일보의 본래 대주주는 성백응 삼보종합건설 회장이었는데 경영난에 빠지자 이 회장이 70억 원을 주고 사들였다. 언론사의 사주가 된 것이다.

이 회장은 경인일보 인수 이후부터 언론인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2012년 “기자 출신 인사는 사안의 핵심을 짚는 데 탁월하고 판단이 정확하고 빠르다”며 “앞으로 가천대 출신의 언론인이 더욱 늘어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밖에도 각종 사회문화사업을 펼치고 봉사단체를 운영한다. 사회문화사업은 가천문화재단이 담당한다. 의료 관련 박물관인 가천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회장은 “가천문화재단은 가천길재단의 정신적 지주”라며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난산으로 출산한 아이가 올곧고 늠름하게 자라 사회를 이끌어갈 든든한 청년이 된 것을 보는 기분”이라고 애정을 보인다.

  '여자황제' 이길여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이 2012년 7월13일 모교인 전북 군산시 대야초등학교에서 거행된 자신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해 동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의사 이길여는 어떻게 경영자로 성공했나

이 회장은 1958년 인천에서 문을 연 작은 산부인과에서 의사로 출발해 병원 대학교 언론 등을 거느린 경영자가 된다.

산부인과에서 출발한 처음 17년은 ‘성공한 산부인과 의사’의 삶이었다. 그러다 1975년 일본에서 의학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도쿄여자의대를 설립한 요시오카 야요이를 알게 되면서 변신을 결심했다.

요시오카 야요이는 의대가 여학생을 뽑지 않자 스스로 1900년 의대를 설립해 여성 의사를 배출한 인물이다. 이 회장은 “선각자 요시오카 야오이를 롤 모델로 삼았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면 종합병원을 세우자는 결심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1978년 인천길병원을 세웠다. 개인이 종합병원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사재를 출연해 법인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로 의료법인을 만든 여성 의사라는 기록을 세운다.

인천길병원은 현재 5개의 종합병원과 1개의 한방병원으로 커졌다. 2012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밝힌 자료를 보면 길의료재단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전국 병원 매출액 8위에 올랐다.

이 회장은 돈만 좇는 경영인은 아니었다. 길의료재단은 의료 취약지대인 양평과 철원에 분점을 냈다. 이곳 병원들은 20년 가까이 적자를 냈다. 이 회장은 “양평병원은 모든 의료인들이 외면했던 곳이라 나도 처음에 꺼렸다”며 “그곳 할머니 한 분이 병원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며 간청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맡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이 회장의 평소 소신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게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이바지하고 또 어떤 영향을 끼칠까를 늘 고민한다”고 말했다.

2006년과 2008년 각각 설립한 뇌과학연구소와 이길여암당뇨연구원은 이 회장의 말을 뒷받침한다. 이곳에 이 회장은 1800억 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 전문가들은 수익만 생각한다면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 회장은 상당히 저돌적인 스타일로 병원을 경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을 확장할 때 5년을 ‘승부기간’으로 삼는다. 5년 동안 적자를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투자를 퍼붓는 식이다.

이 회장의 병원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화가 196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세운 ‘이길여산부인과’다. 당시 병원은 진료비를 떼이지 않기 위해 선불을 받는 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병원 앞에 ‘보증금 없음’을 써 붙였다.

이런 경영이 입소문을 불렀고 오늘의 이 회장을 만들었다. 그는 “그 때 돈을 많이 벌긴 했다”며 “다른 의사가 하루 30명의 환자를 본다고 치면 나는 그 몇 배를 봤다”고 회고했다.

임신부의 편의를 생각해 병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국내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초음파 기기를 도입한 것도 이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에서 보고 온 것 때문에 최신 약이나 설비가 들어오면 아낌없이 투자하다 보니 병원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승부를 걸어야 할 때 거는 스타일이다. 양평길병원도 승부수가 통한 경우다. 그는 1982년 부도가 난 양평병원을 인수하면서 그 조건으로 이 회장이 바라는 곳에 병원을 세울 수 있는 조건을 따냈다.

그 결과 1987년 인천 구월동에 중앙길병원을 세울 수 있었다. 이곳은 인천지역 공단 4개에서 모두 접근하기 쉬운 곳이었다. 중앙길병원은 개원 1년 만에 병상 500개를 두 배로 늘릴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 회장은 병원 경영자로서 오점도 있다. 1999년 벌어진 길병원 ‘유령노조’ 논란이 대표적이다. 길병원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한 뒤 관할구청에 신고서를 냈는데 이미 노조가 설립돼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노조 간부로 등록된 직원들조차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경인일보 인수 후 일방적으로 무급휴일근로와 연장근무를 실시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항의도 받았다. 2004년 철원길병원에서 구급차 운전기사들을 해고하고 이 업무를 외주업체에 맡겼다. 이는 본격적인 병원업무 외주화의 시작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여자황제' 이길여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 1989년 11월 58세 시절의 이길여 가천길재단 이사장 <뉴시스>

◆ 의사 이길여의 바람개비 인생

이 회장은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왔다. 최근까지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일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잠을 줄여라”고 조언한다. 이 회장은 “나만큼 많은 환자를 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그만큼 죽어가는 사람도 많이 살렸다”고 회고한다. 

이 회장은 1932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이 회장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뒷날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사건이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환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것도 이 영향 때문이다. 그는 환자를 대할 때 첫째도 봉사, 둘째도 봉사, 셋째도 봉사를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병원은 환자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회장은 “미국 유학시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의사가 건넨 한마디가 환자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진료를 할 때 미리 품속에 넣어둔 청진기만 사용하는 것도 환자에 대한 배려다. 이 회장은 “차가운 청진기는 긴장된 환자를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며 “그래서 체온으로 데운 청진기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 ‘가슴에 품은 청진기’는 이 회장이 가천의대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직접 걸어준다.

이 회장은 스스로의 삶을 ‘바람개비’에 비유한다. 길병원 로비에 큰 바람개비를 설치해 놓고 있다. 이 회장은 “바람개비는 맞바람이 강할수록 힘차게 돌아간다”며 “바람을 만들고 바람에 부딪히며 헤쳐나가는 것이 내 삶”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