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솔 기자 limhs@businesspost.co.kr2020-05-07 14:44:30
확대축소
공유하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이건희 회장이 한때 삼성그룹의 경영모델로 주목했던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에 다시 시선이 몰린다.
발렌베리그룹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지배구조로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이재용 부회장은 마르쿠스 발렌베리그룹 회장과 17년 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칸디나비아엔스킬다은행(SEB) 회장.
7일 발렌베리 가문 홈페이지를 보면 시조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1856년 스톡홀름엔스킬다 은행(현재 스칸디나비아엔스킬다 은행)을 설립해 발렌베리그룹의 기틀을 닦은 뒤 160여 년 동안 그룹의 경영권을 이어왔다.
현재 발렌베리그룹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며 유럽 최대 규모 기업집단으로 꼽힌다. 산하 기업들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신기업 에릭슨, 방산기업 사브, 미국 증권거래소 나스닥 등 수십 개에 이른다.
발렌베리 가문은 이처럼 규모가 큰 기업집단을 이끌고 있는데도 한국 재벌에서 흔히 보이는 불법 승계, 부모형제 사이 경영권 다툼 등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핵심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데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크누트앤앨리스’, ‘마리안느앤마르쿠스’, ‘마르쿠스앤아멜리아’ 등 3개 비영리 재단을 소유하고 있다. 이 재단들이 아래에 중간지주회사 ‘인베스터’와 ‘팜(FAM)’을 두고 다시 지주회사가 각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한다. 산하 기업들은 인베스터 및 팜을 대주주로 두는 것 이외에 다른 기업과 출자 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발렌베리 가문 일원들은 지주회사나 계열사의 지분을 직접 보유하지 않는 대신 재단이 보유한 지주회사 지분을 근거로 의결권을 확보해 인베스터, 스칸디나비아엔스킬다은행(SEB) 등 주요 회사의 소유권을 보장받는다. 인베스터를 예로 들면 3개 재단이 23.3% 지분을 보유해 차등의결권 50%를 행사한다.
재단들이 적은 지분으로 더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는 1938년 스웨덴 정부와 스웨덴경영자연합(SAF), 스웨덴노동조합(LO) 등 3자가 맺은 ‘샬트셰바덴 협약’에 기인한다. 발렌베리 가문은 당시 협약을 맺으면서 차등의결권을 보장받는 대신 고용보장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이처럼 경영권을 보장받은 만큼 그룹의 이익금이 발렌베리 가문에 쌓이기만 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도 않다.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일원은 지분을 보유하지 않으므로 경영자로서 급여만 받을 수 있다. 스웨덴 경제지 ‘주간사업’이 2014년 147대 부자를 선정했는데 발렌베리 가문 구성원 가운데 아무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정도다.
또 재단 3개는 지주회사를 통해 산하 기업들의 이익을 배당받지만 이 가운데 상당부분을 다양한 공공사업에 투자한다.
크누트앤앨리스 재단만 해도 2019년 24억 크로나(3천억 원가량)을 투자해 의학 및 과학기술 분야를 지원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1억1천만 크로나(137억 원가량) 기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웹진 '기업윤리브리프스' 2017년 3월호를 통해 “1980년대 초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케아는 절세를 위해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겨갔지만 발렌베리 가문은 조세 피난처로 가지 않고 부를 오히려 사회에 환원했다”며 “경영세습과 막대한 부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발렌베리그룹이 국민기업이 된 까닭은 지난 160년 동안 ‘기업의 생존 기반은 사회’라는 창업자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건희 회장 재임 당시 삼성그룹은 이처럼 건전한 지배구조를 본받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발렌베리 가문을 연구했지만 한국의 경영 현실에서 그대로 시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연구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