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사들은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가운데 저유가시대의 개막이 실적에 미칠 영향을 쉽게 전망하기 어려운 만큼 우려 섞인 눈빛으로 유가 변동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왼쪽),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 사장.
9일 원유시장에 따르면 국제유가의 하향 안정화 속도가 빨라져 본격적으로 저유가시대가 올 가능성이 높다.
앞서 5~6일 열렸던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OPEC+)의 정례회의에서 주요 산유국들은 러시아의 반발 탓에 결국 원유의 추가 감산 합의에 실패했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4월부터 산유량을 현재의 하루 970만 배럴에서 하루 1천만~1100만 배럴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발표만으로 6일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전날보다 배럴당 10.1%(4.62달러) 떨어진 41.2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2016년 8월 이후 최저치다.
증권업계에서는 국제유가 하락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러시아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감산 합의로 미국 셰일회사들이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시장 점유율이 오히려 축소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며 “앞으로 러시아도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원유 증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저유가를 강화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증권사들의 국제유가 밴드(변동폭) 전망치도 눈높이가 낮아지고 있다.
9일 메리츠종금증권은 국제유가 밴드를 배럴당 35~50달러로 낮췄으며 하나금융투자는 유가 20달러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OPEC+의 정례회의 이전까지만 해도 증권사들은 대체로 배럴당 45~60달러를 2020년 서부텍사스산 원유 가격의 밴드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망치를 크게 내린 셈이다.
과거 2014년 11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에서 회원국들이 원유 감산 합의에 실패하자 그 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먼저 원유 생산량을 늘렸다. 이후 국제유가는 20~30달러대의 저유가시대에 접어들었다.
증권사들은 과거 사례에 기반을 두고 정유사들의 실적 개선 모멘텀이 다가오고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유가가 급락하면 단기적으로 정유사들에게는 큰 악재다. 비싼 가격으로 축적한 원유 재고의 평가손실이 분기 실적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유가가 하향 안정화하면 정유사들은 낮은 유가로 확보한 가격 경쟁력을 무기삼아 실적을 차차 개선한다.
한승재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부진한 시황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저유가는 정유사들의 원가부담을 완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시황 반등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우호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도 2020년 하반기를 정유업황 회복시점으로 판단하고 정유업종 주식을 지금 매수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작 정유사들은 이런 일반적 사이클이 이번 저유가시대에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낮은 유가가 정유사들의 원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유제품의 수요가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현재 정유제품시장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라는 장기적 수요 부진 요소에 코로나19라는 단기적 악재가 겹쳐 있다.
▲ 후세인 알 카타니 에쓰오일 대표이사(왼쪽),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한 정유사 관계자는 국제유가와 정유제품의 가격 연동경향을 설명하며 앞으로 다가올 저유가시대가 정유사 실적을 더욱 끌어내릴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국제유가의 변동과 싱가포르 정유제품 거래소의 가격 변동에는 시차가 있다.
그런데 국제유가가 상승세일 때 정유제품 가격이 높아지는 속도보다 국제유가가 하락세일 때 정유제품 가격이 낮아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향이 있다.
국제유가가 급락하는 시기에 정유사들이 가격 변동의 시차를 활용해 누릴 이익 개선효과는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정유제품 수요가 많지 않은 업황 속에서 저유가가 지속된다면 비싼 가격으로 축적한 원유 재고의 소진시점도 늦어져 오히려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조차 있다.
이 관계자는 “과거 사례를 살펴보면 국제유가 하락기보다 상승기에 정유사들의 이익 수준이 더 높았다”며 “이번 저유가시대에는 정유제품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조차 불확실해 긍정적 전망을 내놓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