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백혈병 산재 논란과 관련해 사뭇 변한 태도를 보였다. 반도체 사업장 근무와 백혈병 발생은 무관하다는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7년 만의 태도 변화다. 삼성전자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영화 한 편이 삼성전자를 움직였다  
▲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김준식 삼성전자 부사장은 14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백혈병 산재 논란과 관련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제안한 중재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부사장은 “이른 시일 내에 경영진이 공식입장을 말할 것”이라며 “날짜는 확답할 수 없지만 빨리 (해결하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혈병 피해자들의 원인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근무와 관계있느냐는 질문에 “여기서 확답할 수는 없다”며 “여러 가지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심상정 의원은 11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피해자와 가족에게 공식사과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한 보상 ▲사업장 내 안전진단과 재발방지책 수립 등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김 부사장은 이에 대한 화답 차원으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심 의원은 15일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지 7년만에 처음으로 전향적 자세를 취할 뜻을 내비친 데 대해 늦었지만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삼성이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사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 당사자, 피해자 가족들과 성실하게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특히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한 보상'에 대한 언급이 당사자들과 협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피해자 가족들의 우려가 있음을 유념해 성실하게 협의해 줄 것을 당부한다"며 "당사자간의 협상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국회가 해야할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근무 직원의 백혈병 발병 문제는 2007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 다닌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제기됐다. 이후 반도체 사업장 근무와 백혈병 발병이 인과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부터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반올림)’와 보상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이 삼성전자를 움직였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포스터
김 부사장의 이번 발언은 삼성전자 경영진으로서  백혈병 문제에 대한 첫 공식발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변한 것은 올 초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또 하나의 약속’은 황유미씨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다. 영화는 대기업 근무중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딸을 위해 거대기업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봉 전 외압설과 상영관 확보난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공식 관객 49만6178명을 동원하며 여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 입소문을 타며 호평을 얻었다. 영화 제작비는 100% 일반 투자자들의 모금으로 충당됐다.

영화 개봉 후 ‘공정사회 파괴 노동인권 유린 삼성 바로잡기 운동본부’가 출범하는 등 삼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됐다. 심상정 의원 등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직업병 피해자 및 유족의 구제를 위한 결의안’을 국회에서 발의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지난 3일 ‘또 하나의 약속’을 2014년 1분기 청소년을 위한 좋은 영상물에 선정했다.

이렇게 영화로 조성된 여론이 전방위로 삼성전자를 압박한 것에 삼성전자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대응이 초기와 달라졌다.

삼성전자는 이 영화에 대해 공식 대응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영화 상영 초기에 삼성전자 DS부문 커뮤니케이션팀에 있는 한 부장이 영화 관람 후 “영화는 영화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며 “예술의 포장을 덧씌워 일방적으로 상대를 매도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삼성전자 블로그에 게시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