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
현대가와 삼성가가 또 손을 잡았다. 정몽진 KCC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도우미로 나선 것이다. 단순히 사업목적이 아니라 경영권 방어를 위한 협력이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면세점사업을 위해 손잡은 것보다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삼성과 현대는 20세기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쌍두마차다. 특히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명예회장과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은 재계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국내 최고의 그룹을 일궈냈지만 시작은 판이하게 달랐다. 이 명예회장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정 명예회장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서로 다른 출발점만큼이나 경영방식도 달랐다. 정 명예회장은 과감하고 뚝심이 있었다면 이 명예회장은 치밀하고 신중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 두 사람의 관계는 껄끄러운 편이었고 삼성가와 현대가 사이의 왕래도 드물었다.
오너 2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기아자동차 인수 등을 두고 경쟁하며 선대의 라이벌 구도를 이어왔다. 사업을 위해 협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삼성과 현대는 건설업과 조선업 등 주요산업에서 경쟁하고 있다. 재계 전체 순위에서도 1·2위에 나란히 올라 있다.
삼성과 현대는 지난해 한전부지 인수전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가 한전부지를 10조5500억 원이라는 거금에 인수한 배경에 삼성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한몫했다는 관측도 있다.
이 때문에 삼성가와 현대가가 손을 잡는 것은 이례적이다. 비록 KCC나 현대산업개발이 현대가문의 적통인 현대자동차그룹은 아니지만 정몽진 KCC 회장과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오너 2세로 범 현대가에 속한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삼성-현대 협력의 첫 발을 뗐다. 두 사람은 공동출자법인을 설립해 HDC신라면세점을 출범했다. 그리고 서울 시내면세점 입찰에 뛰어들었다.
이부진 사장과 정몽규 회장은 이해관계를 앞세운 제휴의 성격이 강하다. 면세점사업의 풍부한 노하우를 쌓은 호텔신라와 최적의 부동산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는 현대산업개발의 사업 시너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
|
|
▲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
하지만 정몽진 KCC 회장의 삼성물산 지분취득은 그 의미가 다르다. 외국 헤지펀드가 삼성그룹의 취약한 지배구조를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물산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손잡았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삼성물산 지분을 취득해 우호세력으로 지원에 나서면서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 확보를 위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은 성사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대가가 삼성가의 경영승계를 돕는 데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삼성가와 현대가의 협력관계가 전방위로 확대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오너 3세인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의 친분이 깊은 점을 고려하면 이런 전망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은 개인적으로 만나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두 기업의 대표계열사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손잡고 스마트카사업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가와 현대가가 손을 잡는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이유로 이건희 회장의 부재가 꼽힌다. 지난해 갑작스레 이 회장이 물러나게 되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서게 됐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은 완벽히 준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경영승계를 가속화하려니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삼성가와 현대가가 계속 밀월관계를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KCC는 제일모직 2대주주로 합병이 성사되면 합병 삼성물산의 지분 8.89%를 보유하게 된다. 이재용 부회장(16.40%)에 이어 2대 주주 자리를 공고히 한다.
더욱이 합병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나 마찬가지인 회사다.
만약 KCC가 합병 삼성물산의 경영참여를 시도하거나 최대주주 의견에 반대할 경우 이 부회장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의 이익 앞에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다”며 “우호세력이라고 하지만 현대가가 삼성그룹 전체 지주회사의 2대 주주가 된다는 의미는 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협력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해도 만약 이건희 회장이었다면 현대가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KCC 관계자는 “재무적 투자자로 지분을 취득했을 뿐 합병 뒤 경영에 참여하는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