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부재에 따른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중인 대기업 집단이 늘어나면서 그 안팎의 경영상 행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들 대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의사결정권을 1인이 아닌 체계화한 집단에 맡기고 위기극복에 전력투구하는 모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제왕적 경영 방식에 익숙해진 대기업들이 최고경영자의 공백에 따른 ‘CEO 리스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회장님은 구속중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2심에서 모두 실형이 선고돼 오는 20143월 대법원 상고심을 기다리고 있다.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후 1,2심 선고를 받는 동안의 기간도 상당했지만 앞으로 경영공백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3년 연말 회장님은 구속중...안녕하지 못한 그룹들  
▲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SK
그룹의 SK텔레콤은 12월 들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우량 매물로 평가받던 ADT캡스 인수전 참가를 포기했다. SK텔레콤은 당초 1조원을 훌쩍 넘는 매물로 나온 ADT캡스에 대한 전략적 투자자의 강력한 후보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최 회장의 부재에 따른 의사결정이 쉽지 않아 후폭풍에 휩쓸리고 있다는 평가다.
 
또다른 계열사 SK E&S도 지난 9STX에너지 인수의향서 제출을 앞두고 M&A 참여 포기를 선언했다. 역시 1조원에 달하는 매물로 나온 STX에너지를 잡을 때 필요한 최고경영자의 용단이 쉽지 않다는 게 SK그룹의 설명이다. SK E&S 대표이사인 최재원 부회장도 구속된 상태다.
 
한화그룹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기업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한화그룹의 5개 계열사가 올해 3분기까지 보인 유무형 자산 취득액은 661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기간 7992억원에 비해 16.5%나 감소했다. 한화그룹 의사결정의 처음과 끝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승연 회장의 부재로 해외사업 부문의 추진력이 크게 약해졌고 태양광 등 신성장 사업 투자도 보류되고 있는 게 속사정이다.
 
이재현 회장의 구속과 건강상 문제로 어느 곳보다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게 CJ그룹이다. 조세포탈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이 회장이 구속된 이후 핵심 계열사들은 잇따라 신사업 보류 방침을 밝혔다CJ제일제당은 바이오 부문 글로벌 시장 지배력 1위를 달성하기 위해 추진중이던 중국 라이신 업체 인수 협상을 중단했다.
 
생물자원(사료) 사업 부문의 경우 글로벌 사업 확장을 위해 추진 중이던 중국과 베트남 현지 투자 협상도 지연되고 있다특히 2011CJ그룹이 인수한 대한통운은 당초 해외 M&A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 구속 이후, 최근까지 추진해온 1조원대 미국 물류 업체 인수를 잠정 보류했다.
 
조석래 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가 한창 진행중인 효성그룹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3분기까지 효성의 유무형 자산 취득액은 539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8.7% 감소했다. 국세청 세무조사부터 검찰 수사까지 파란을 겪으며 신사업 참여가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2013년 연말 회장님은 구속중...안녕하지 못한 그룹들  
▲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LIG
그룹은 지난 8월 구자원 회장과 구본상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 주력 계열사인 LIG손해보험을 매물로 내놓았다. 사실상 그룹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지난해 LIG그룹의 전체 매출 12조원 가운데 LIG손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86%(103000억원)에 달했다. 그룹의 금융 부문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외형도 7분의1 수준으로 줄어들 게 뻔하다.
 
총수 자리 메우기 그러나 역부족 우는 소리
 
SK그룹은 올해 들어 계열사의 자율책임 경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따로 또같이 3.0 체제를 도입해 실시중이다. 구속중인 최태원 회장이 남겨둔 자리는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의장과 산하 6개 위원장이 공동으로 맡고 있다. 하지만 의사결정보다는 조정역할에 가깝다
 
최 회장이 개인적 인맥을 통해 사업 기회를 창출했던 해외 사업 부문의 경우 그의 공백이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부분으로 꼽힌다. SK그룹은 최 회장의 구속 이후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진출에서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화그룹의 경우 지난 4비상경영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이 위원장을 맡아 금융 부문을 총괄하고,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이 제조 부문을,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이 서비스 부문을 맡고 있다.
 
한화그룹의 경영상 최종 의사결정은 이들이 참여한 전원합의체 기구에서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지난 4월 단행된 임원 인사를 제외하면 비상경영위원회 차원의 결정은 의외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화그룹은 두해 연속 경영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 구속 직후인 지난 7월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회는 이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 회장과 여동생인 이미경 부회장, CJ주식회사 겸 CJ대한통운 대표 이채욱 부회장, CJ제일제당 대표 김철하 사장 등 4명으로 구성된다.
 
CJ그룹의 그룹경영위원회는 한화그룹의 비상경영위원회와 비슷하지만 오너 일가와 전문경영인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사업 확대보다 관리 체제 성격이 강하다. 이른바 최 회장의 경영 공백을 가족 경영으로 메꾸고 있다는 평가다.
 
태광은 지난해 2월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오용일 부회장 등 회장단이 일괄 사퇴한 이후 레드캡투어 대표로 재직중이던 심재혁 부회장이 태광산업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심 부회장은 이 전 회장의 처외삼촌으로 인척이지만 사실상 외부 수혈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심 부회장은 경영을 맡은 첫해 적자를 기록하는 등 고전했다. 지난 8‘2014년 사업계획 발표회에서 2020년까지 연매출 8조원, 영업이익 8000억원 달성을 목표로 체질 개선에 진력하고 있으나 결과는 미지수다.
 
제왕적 경영에 따른 CEO 리스크는 결국 시스템이 대안
 
재계는 최근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대한 크나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총수 부재로 곤란을 겪는 다른 그룹들과 달리 SK그룹의 경우 총수의 경영 공백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안정적인그룹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김창근 협의회장을 중심으로 한 6명의 집단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다.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재열 SK 부회장(SK 동반성장 위원장), 하성민 SK텔레콤 사장, 김영태 커뮤니케이션 부문 사장, 정철길 SK C&C 사장이 6명의 집단지도 체제 주인공이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SK그룹이 발족시킨 독특한 경영 전략 회의로, 그룹 총수와 함께 그룹의 비전을 공유하고 미래사업의 선택과 투자 여부를 고민하는 일종의 최고경영자 회의다. 계열사 CEO들이 참가하는 6개의 위원회로 구성된다.
 
올해 초 최태원 회장의 구속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총수 부재때 그룹의 경영 전략을 결정하는 집단지도 체제 시스템으로 변신했다. 최 회장의 구속이 확실시되면서 협의회를 통해 계열사별로 자율 책임 경영을 주요 내용으로하는 따로 또같이 3.0’이라는 경영 방침을 도입했다. 지난 10월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본사 사옥에서 열린 정례 CEO 세미나에서 2014년 그룹의 경영 방침인 안정속 성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같은 오너 부재 상황은 명백한 CEO리스크다. 오너가 없는 기업은 이른바 익숙한 것, 실패하지 않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같은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진다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
 
중소기업은 검찰 수사 등 한번의 대내외 리스크에 문을 닫지만 대기업은 서서히 침몰해 가는 게 이제껏 경험해온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SK그룹의 경우 계열사 오너들로 구성된 수펙스추구협의회를 가동하면서 그룹 총수의 공백을 메우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