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V 배터리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꼴 면할까, 한국 중국에 반격 시동

▲ 1월10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에 참가한 파나소닉이 전기차 모형을 부스에 설치하고 배터리를 포함한 관련 기기들을 선보이고 있다. 어안 렌즈로 촬영.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수년 동안 수천억 원의 적자를 감내하고 선제적으로 기술개발(R&D)에 투자해 한국 배터리 산업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 있다. 고(故)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다. 

LG그룹이 2차전지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본무 전 LG 회장은 당시 유럽 전시회에서 일본 업체들의 2차전지 기술력에 감탄해 LG그룹도 배터리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LG에너지솔루션은 현재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배터리시장 1위 기업으로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시장 성장에 수혜를 보며 이를 확실한 그룹 주력사업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러나 구 전 회장이 롤모델로 삼았던 일본 배터리업체들은 현재 세계 상위권에서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내수시장 수요와 독자적 기술에 매몰된 사이 한국과 중국 배터리업체의 급성장에 밀려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이처럼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산업에서 한국과 중국 경쟁사에 밀려나고 있는 것은 이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서 벌어진 전례가 있다. 일본 정부는 배터리사업마저 같은 길을 걷는 패착을 다시 겪지 않겠다는 목표를 두고 정부 지원을 대폭 늘리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17일(현지시각) 일본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2024년부터 2030년까지 모두 3조4천억 엔(약 30조9022억 원)을 투자해 배터리 제조업 활성화에 나선다. 

연간 5조 원 이상을 투자해 일본 업체들이 전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 20%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다.

재정지원 외에 다른 산업 부양책도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산학 협력이다. 

공립학교인 오사카 부립대학은 일본 배터리 기업 30여개사가 함께 설립한 ‘배터리 공급망 협의회(BASC)’와 함께 2023년 12월 배터리 수업을 개설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배터리 교육 내용이 담긴 교과서를 직접 집필했다고 한다. 

BASC의 임원인 모리시마 류타는 닛케이아시아를 통해 “배터리 산업을 부양시키는 데 향후 몇 년이 정말 중요하다”라며 “우리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재계가 배터리 산업에 집중하는 이유는 일본 배터리 기업들이 중국과 한국의 경쟁사들에 밀려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배터리 기업 순위를 보면 일본의 최대 배터리업체인 파나소닉은 중국 CATL과 BYD(비야디) 그리고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에 이어 4위다. 10위권에 파나소닉 말고 다른 일본 기업은 없다. 

원래 2차전지 산업을 제패했던 곳은 일본 기업들이었다. 

2차전지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1985년 일본인 화학자가 처음 개발했다. 이후 소니가 1991년 최초로 양산 및 상용화에 성공해 세계 시장을 선점했다. 

전기차 선도기업인 테슬라가 2008년 출시된 자사의 첫 차량인 로드스터에 파나소닉의 리튬이온 배터리 셀을 사용한 점도 일본의 배터리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일본 업체들은 2010년대까지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완성차 기업들이 기술력 유출을 염려해 한국 배터리 업체들과 협업을 꺼렸다는 일화는 업계에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기술을 한국에 빼앗겼다고 여기다 보니 배터리 기술만큼은 유출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EV 배터리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꼴 면할까, 한국 중국에 반격 시동

▲ 2002년 10월 고(故)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오른쪽)이 전기차 ‘ER2’ 시제품에 탑승해 테스트를 하고 있다. ER2에는 LG화학이 2차전지 개발을 목적으로 미국 콜로라도주에 세운 현지법인 컴팩트파워(CPI)가 만든 배터리가 탑재됐다. 해당 차량은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이라는 이름의 자동차 경주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 LG그룹 > 

당시 한국은 세계 최고였던 일본 배터리 산업을 추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LG그룹이 대표적이다.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2차전지를 기업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1992년 럭키금속, 이후 1996년부터 LG화학을 중심으로 연구에 착수했으나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기 여의치 않았다. 

LG그룹은 2005년 2차전지 사업에서만 2천억 원이 넘는 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LG그룹은 오너경영의 장점을 살려 꾸준히 투자를 이어와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 기업으로 등극했다. LG화학에서 분사한 LG에너지솔루션은 파나소닉과 함께 테슬라에 배터리를 납품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 받고 있다. 

SK온과 삼성SDI도 주요 완성차 업체들을 고객으로 확보하며 세계 10위권 배터리 업체로 성장했다. 

한국과 일본 기업들의 처지가 뒤바뀐 셈이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도 정부의 강력한 지원책과 중국 국내의 막대한 수요에 힘입어 배터리 사업을 빠르게 키우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시장을 선점했다가 중국과 한국에 추격을 허용한 사업은 배터리뿐만이 아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나타났던 적이 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일본전기주식회사(NEC)와 도시바와 같은 인본 기업들은 1990년대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첨단 반도체 제조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삼성전자나 대만 TSMC등에 기술 우위를 내주고 말았다. 

디스플레이 산업에서도 2023년 3월 JOLED가 도쿄지방법원에 사실상 파산 조치인 민사재생 절차를 신청하면서 한중이 주도권을 완전히 쥐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배터리 산업의 향후 전망도 긍정적이지 않다는 전문가 의견이 있다. 

미국 컨설팅회사인 아서 디 리틀(ADL)의 자동차 전문 분석가 오카다 마사시는 닛케이아시아를 통해 “중국과 한국 업체들이 전 세계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는 와중에 일본 업체들은 너무 몸을 사렸다”라며 “일본의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 업체들이 전기차 배터리의 주요 시장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다수의 생산 공장들을 확보하고 고객사들과 협력을 늘려나가고 있어서다. 

닛케이아시아는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산업에서 주도권을 잃었다는 것에 여전히 낙담하고 있다”라며 “배터리 산업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끔 다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