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비정상적 공급자 위주의 시장 환경이 사라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가격 인하에 나서고 차량 출고 대기기간까지 줄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3년여 만에 차 사기 좋은 날들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코로나19 확산 뒤 3년 여 기간 동안 드리웠던 비정상적 공급자 위주의 시장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차량용 부품 부족으로 차를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가던 환경에서 생산이 정상화하고 수요가 위축될 조짐을 보이자 완성차업체들은 차량 가격 인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차량 출고 대기기간까지 줄고 있어 4분기로 갈수록 국내 소비자들은 오랜 만에 '차 살 맛'이 나는 시절이 올 것으로 보인다.
11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뒤 연식변경 등을 통해 원자재 가격 인상분을 빠르게 판매 가격에 반영해왔던 국내 완성차업체들이 최근 잇달아 주력모델의 가격인하를 단행하고 있다.
KG모빌리티는 이날 토레스의 연식변경 모델인 '2024 토레스'를 출시하며 판매가격을 동결하고 일부 트림에서는 가격을 내렸다.
KG모빌리티는 토레스 1.5 가솔린 터보 모델의 기본 트림인 T5에 옵션으로 운영되던 오토 라이트 컨트롤, 우적 감지 와이퍼, 스마트 하이빔, 스마트 미러링, 스마트키 시스템 등을 기본으로 적용하고 가격을 기존보다 55만 원 내린 2797만 원으로 책정했다.
상위트림인 T7은 동승석 파워 시트, SUS 도어스커프, 스마트키 2개+디지털키, 3D(차원) 매쉬매트, 인포콘 무상서비스 기간 연장(2년→5년) 등을 기본 적용하고 가격은 3174만 원으로 동결했다.
또 가솔린의 성능과 LPG의 경제성을 두루 갖춘 토레스 바이퓨얼 모델 TL5 트림 가격은 3127만 원으로 매겨 기존보다 55만 원 인하했다.
토레스는 지난해 7월 독창적 디자인과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출시된 뒤 국내 자동차 판매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모델이다.
르노코리아는 9월 '밸류 업'(가치 높이기)를 테마로 한 두 번째 르노 익스피리언스를 실시하며 내수 판매량이 가장 많은 QM6의 LPG 모델 기본트림 가격을 91만 원 인하했다. 또 QM6 LPe RE트림은 시작 가격을 195만 원, 1열 이외 공간을 모두 적재함으로 구성한 QM6 퀘스트 2.0 LPe는 185만 원 낮춰 각각 3170만 원, 2495만 원에 판매하고 있다.
더욱이 르노코리아는 6일 QM6 LPG 모델에 전시장 특별 프로모션과 재구매 혜택 등을 더해 최대 390만 원의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8일 아이오닉6 연식변경 모델을 내놓으며 상위트림인 익스클루시브 플러스 트림을 고객 선호 사양으로 재구성하고 판매가격을 70만 원 내렸다. 나머지 트림 역시 선호사양을 기본화하면서도 가격은 동결했다.
지난해 현대차 아이오닉5와 기아 EV6가 연식변경을 통해 판매가격을 트림별로 최대 400만 원가량 올렸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아이오닉6 연식변경 모델의 가격정책은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최근 국내 전기차시장도 판매 증가세가 크게 꺾이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국내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63.8%에 달했지만 올해 들어 8월까지 누적판매에서 전년 동기와 비교한 판매 증가율은 3.6%로 급락했다.
아이오닉6는 국내 전기차 수요 위축 조짐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아이오닉6 월간 판매량은 지난해 11월 3905대까지 치고올라갔으나 4월 1천 대 수준으로 내려온 뒤 지난달에는 400대에 그쳤다.
이런 판매 부진의 원인으로는 높은 가격이 가장 먼저 손에 꼽힌다.
김진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전기차 판매 감소의 가장 큰 배경은 가격에 대한 저항이다"며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서 수요층의 눈높이도 높아지고 의사결정도 깐깐해졌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실제로 국내 전기차 판매가 꺾인 시점은 중국산 테슬라가 저가에 수입된다고 알려진 5월부터"라고 덧붙였다.
테슬라는 7월 중국 상하이 공장에서 생산된 모델Y 후륜구동(RWD) 모델을 국고 보조금 100%(680만 원) 지급 기준에 맞춘 가격(5699만 원)에 국내에 출시했다. 중국산 모델Y는 기존 고성능 삼원계 배터리를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로 바꿔달고 기존 모델과 비교해 가격을 2천만 원 넘게 내렸다.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가격 인하 분위기는 전기차와 국산차에 국한되지 않고 인기 수입차 브랜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신차 구매 플랫폼 겟차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E클래스(준대형 세단) 대부분 트림에서 10%대 금액 기준으로 1천~2천 만 원, 대형 전기 세단 EQS는 10% 중반 대로 2770만~3200만 원에 달하는 할인을 제공하고 있다.
BMW도 플래그십 세단인 7시리즈 가솔린 모델 대부분에 약 10%, 1500만~2200만 원의 할인을 제공한다. 중형 전기 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 iX3는 출고가격에서 20.8%(1720만 원) 내린 6539만 원에 판매하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370만 원을 제외해도 할인 금액이 1350만 원에 달한다.
코로나19 확산 뒤 3년 여의 기간 동안 완성차업체들은 차량용 반도체 등 자동차 부품 공급 부족 문제로 생산 차질을 빚으면서 유례없는 공급자 우위 시장 환경을 맞았다.
차를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가는 시장 환경에서 완성차업체들은 찻값을 깎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 원자재 가격 인상분을 차량 가격에 수월하게 반영하며 판매에 나섰고 그럼에도 차를 사려는 소비자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생산 차질 해소로 산더미처럼 쌓였던 밀린 주문이 빠른 속도로 소진되면서 공급자 우위의 시장 환경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의 차종별 예상 납기표를 보면 지난해 12월 아이오닉6를 계약하면 차를 받기 까지 1년6개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9월엔 그 기간이 1개월로 크게 줄었다. 같은 기간 아이오닉5는 12개월에서 3주로, 기아 전기차 EV6 역시 12개월에서 4~5주로 대기기간이 짧아졌다.
올해 누적 내수판매 1위 현대차 그랜저 2.5 가솔린 모델은 11개월에서 3개월로, 아반떼 가솔린 모델은 9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됐다.
내수 판매 2위 기아 카니발은 올해 1~8월 전년 동기보다 판매량을 36.4% 늘렸음에도 지난해 12월 디젤 모델은 16개월 이상, 가솔린 모델은 6개월 이상 걸리던 대기 기간이 이달엔 각각 4~6주로 줄었다.
특히 8월 국내 자동차 판매실적을 살펴보면 고급차와 전기차 등 비싼차 판매가 위측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의 8월 국내 자동차 판매량은 지난해 8월보다 12.9% 늘었지만 같은 기간 고급브랜드 제네시스 판매량은 4.5% 줄었고, 전기차 판매량은 30%나 꺾였다.
기아는 8월 국내 판매량이 전년 동월보다 10.9% 줄어든 가운데 모닝, 레이, K3 등 경차 및 소형차 판매는 각각 35.2%, 55.2%, 40.4% 급증한 반면 준대형 세단 K8과 대형 세단 K9 판매량은 반토막이 났다. 8월 니로 EV, EV6, EV9 등 전기차 합산 판매량은 지난해 8월보다 44%나 줄었다.
특히 올해 EV9이 전기차 라인업에 추가된 점을 고려하면 기아의 전기차 판매부진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읽힌다.
고가 차량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최근 수요 위축 추세는 현대차그룹의 수익성에는 더욱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는 올해 연말이 다가올수록 3년여 만에 '차 살 맛'이 나는 시장 구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국내에서 전기차 판매가격을 낮추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고 내연기관차에서도 마찬가지 흐름이 보인다"며 "완성차업체는 후반기로 갈수록 실적에 대한 부담이 되고 그런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점차 할인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11월, 12월이 되면 할인혜택이 더 많아질 수 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를 노려볼 만 하다"고 덧붙였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