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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 |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삼성의 스티브 잡스’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회장이 지난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이런 평가를 하면서 삼성그룹이 중대한 갈림길에 선 시기에 이 회장의 건강문제가 불거졌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포브스는 “삼성은 이 회장의 건강악화 의미를 축소하려 하지만 후계자 문제와 스마트폰사업 부진 등을 고려할 때 삼성에 대한 ‘심판의 날(a day of reckoning)’이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건희 회장은 40여년 전 돌연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된 뒤 숱한 심판의 날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갈림길에서 삼성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시했다. 포브스는 이재용 부회장이 갈림길에 선 삼성그룹을 두고 이건희 회장처럼 갈 길을 제시할 수 있을지 묻고 있는 셈이다.
이 회장은 회장직에 오른 1987년 ‘이병철 체제’의 삼성전자에 ‘반도체’와 ‘스마트폰’이라는 미래 먹거리를 제시해 삼성전자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재용체제에서 이재용 부회장도 그럴까?
◆ “텔레비전 몇 대”와 맞바꾼 ‘반도체’
이병철 창업주와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사업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평소 이병철 회장은 치밀하고 세세한 경영관리에 능한 데 비해 이 회장은 미래의 큰 그림을 잡는 것을 좋아하는 등 경영스타일이 달랐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가 전자부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반도체사업에 비용을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1974년에 사비를 털어 파산직전이던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이병철 회장은 당시 “그 돈으로 텔레비전을 몇 대를 더 생산할 수 있는데”라며 이건희 회장을 타박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1983년 연인원 26만 명을 투입해 6개월 만에 기흥공장을 완성했다. 반도체공장을 짓는데 선진국에서도 1년 6개월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강하게 사업을 몰아붙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0년도 채 안 된 1990년 선진국도 주저했던 ‘8인치 웨이퍼’ 투자를 선언했다. 당시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은 극심한 불황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바, 히다치 등 일본 반도체업체들도 새로운 도전을 멈칫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도전이 실패하면 1조 원 이상의 막대한 손실을 보게 돼 회사 자체가 망한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신기술 선점이라는 도박에 가까운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이 회장은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 회장은 반도체라는 이름 자체에 직관적으로 끌렸다. 우리나라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이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 회장은 이런 문화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는 반도체사업과 맞아떨어진다고 믿었다.
이 회장은 또 주변정황도 충분히 분석했다. 전 세계가 1973년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자원 하나없는 우리나라에서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이 회장은 공장을 지은 지 10년 만인 1993년 일본을 제치고 메모리 반도체분야에서 세계정상에 올랐다. 당시 미국과 일본언론은 일제히 “삼성이 기적과 같은 일을 해냈다”고 놀라워했다.
이 회장은 이를 놓고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사업으로 시작한 반도체가 10년 만에 삼성의 핵심사업으로 인정받았다”고 자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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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 '재빠른 대응'으로 애플을 제치다
“삼성전자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전자레인지 같은 제품을 생산해 미국시장에 뛰어들어 지금도 결국 헐값에 파는 값싼 브랜드다.”
포춘이 2002년 삼성전자에 대해 보도한 글이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외에서 이런 저가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건희 회장은 2010년 ‘스마트폰’ 하나로 삼성전자의 브랜드 이미지를 뒤집었다. 2012년부터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며 외국인들의 손바닥 위에서 ‘삼성’이란 브랜드를 다시 알렸다.
이 회장은 2010년부터 ‘빠른 추격자’ 전략을 선택했다. 아이폰 등 혁신제품으로 휴대폰 1위기업 노키아까지 무너뜨린 애플을 따라잡는 목표를 세웠다.
삼성전자는 2009년까지 스마트폰으로 세계 5위에도 들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 세계 시장점유율도 3.2%로 존재감 자체가 희미했다. 하지만 피처폰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어 수익창출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잘나가던 피처폰사업을 멀리하고 스마트폰 후발주자임을 자처했다. 승리에 도취돼 애플을 얕잡아본 노키아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하자 마자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수원사업장을 직접 찾았다. 이 회장은 “세상 어떤 스마트폰보다 더 강력한 스마트폰을 만들어 달라”고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지금까지 삼성을 대표하던 모든 제품이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마트폰에 집중할 것을 선언했다.
이 회장의 이런 지시가 있고 3개월 만에 ‘갤럭시S’가 세상에 나왔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시리즈로 애플을 빠르게 추격해 2년 만에 시장 선도주자가 됐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삼성이 최근 거둔 성공은 기술 리더십에 기반을 둔 게 아니라 신속한 대응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이 회장을 두고 재빠른 ‘세일즈 머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 회장이 두 달만 늦게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았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업계는 분석한다. 노키아가 두 달 뒤에 스마트폰을 내놓았지만 이미 삼성전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 하루아침에 후계자 된 이건희의 압박감
이 회장은 삼남인데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후계자로 지목됐다. 이 회장마저도 취임 초창기에 창업주에 대한 믿음이 컸던 직원들을 이끄는 데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병철 회장은 장남인 이맹희씨에게 1973년 “다 잘 할 수 없으면 잘 할 수 있는 것만 해라”고 했다. 그리고 1976년 일본으로 폐암수술을 받으러 가기 전 날 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이 회장은 1977년 공식적으로 삼성그룹을 이끌 후계자가 됐다. 1979년 쟁쟁한 형들을 제치고 삼성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1987년까지 혹독한 경영수업을 7년 동안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부회장 시절 실패만 거듭했다. 에너지사업 실패로 경영능력에 대한 악평이 무성했다. 이 회장은 1987년 1월 46세 젊은 나이로 그룹 총수가 됐지만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 회장은 스스로 “이건희가 과연 이병철만큼 삼성을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압박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3년이 지난 1992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당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렸고 하루에 한 끼도 간신히 먹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