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전문가가 과거에는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현재 시각에서 만든 틀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과거를 선택적으로 들고와 그 틀에 맞춰 해석한다.
과거 왜곡 말라, 세종의 한글창제는 의문의 여지 없다

▲  백우진 칼럼니스트.



작가와 일반인은 전문가보다 상상력을 훨씬 더 발휘해 과거를 편집하고 왜곡한다. 

한글이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한글을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의 으뜸가는 지적 창조물로 꼽는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가 당시에도 위대한 업적이자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고 상상한다. 

이런 상상은 ‘그래서 그 업적을 임금 세종의 공으로 돌렸다’는 추정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上親制 諺文 二十八 字)’는 기록은 그런 연유로 지어졌을 뿐 사실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글 창제를 일대 사건으로 인식했으리라는 추정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소설 '뿌리 깊은 나무'의 뼈대가 됐다. 이 소설에서 세종과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은 물론 최만리 부제학이 이끄는 한글 반대파도 이 인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글 반포는 조선이 중화(中華)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를 선언하는 일이다. 따라서 명나라는 조선의 한글 창제와 활용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소설 속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추진한다. 이를 눈치챈 반대파는 한글 창제를 저지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을 잇따라 살해하고 세종까지도 협박한다. 

한글창제는 폄하됐고 한글은 천대받았다  

우리는 현재의 평가가 아니라 당시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발언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와 반응을 이해해야 한다. 이하 발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용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碍)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또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며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만리는“명나라가 언문 창제를 알고 노(怒)할까 두렵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고 말했다.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명나라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한 게 아니라 ‘명나라를 사모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심히 부끄럽다’고 토로한 것이다. 

독자적인 문자창제와 활용이 중화주의에서 이탈하는 행위라는 인식은 중국이 주변 다른 여러 나라의 자체 문자창제에 아무런 제재나 응징을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기각된다. 최만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라고 상소문에 썼다. 

한글에 대한 반발은 강하지 않았고 지속되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기준으로 할 때 한글 활용에 반대하는 주장은 단 한 차례 제기됐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 내내 문자에서 한자의 지배가 굳건했고 한글은 변방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논의를 요약해보자. 당시 한글은 긴요하지 않은 문자로 여겨져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논란은 뜨겁지도 지속되지도 않았다.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세종이 창제”

이제 '한글은 세계 문자사에 전무후무한 창안'이라는 후세의 평가가 투영된 한글을 세종이 혼자 만들었을 리 없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다는 기록에서 벗어난 주장은 성현(1439~1504)이 '용재총화'에서 처음 내놓았다. 이 책에 실린 한글 관련 내용은 정황상 신뢰도가 높지 않다.

우선 이 책은 설화집이고 또 한글이 창제된 지 40년 넘게 흐른 뒤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해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해 언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언문청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세워졌다. 

세종의 명령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 주장이 힘을 잃자 ‘협찬설’이 등장했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한글을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 “어제(御制)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라고적었다.

성삼문은 '홍무정운역훈' 서문에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운학(韻學)에 마음을 두고 깊이 연구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고 전했다. 당시엔 한글이 엄청난 지적 창안이라는 인식이 희박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 기록은 가감없이 받아들여도 된다. 

한글에 대한 세종의 애착은 유별났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세종이 신하가 만류할 정도로 한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한글이 자신이 만든 문자였기 때문이다.

세종만 어간에 따라 받침 적었다

한글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근거 가운데 덜 알려진 방증이 세종이 직접 짓고 챙긴 간행물의 맞춤법이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의 관점에서 ‘맞춤법을 둘러싼 공방’을 지켜보자.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손수 지었고 '용비어천가'는 준비부터 간행까지 직접 챙겼다.

두 책의 한글 받침(종성)에는 ㅈ, ㅊ, ㅌ, ㅍ 같은 낱자가 들어갔다. 당시 나라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석보상절'이 전적으로 그 규정에 따른 것과 대조적이다.

첫 맞춤법 규정은 '팔종성가족용(八終聲可足用)'이다. 쉽게 쓰자고 만든 한글이니 받침은 간편하게 ㄱ, ㄴ, ㄷ, ㄹ, ㅁ, ㅂ,ㅅ, ㅇ 이 여덟 자음만 쓴다는 것이다. ㅈ과 ㅊ은 ㅅ으로, ㅌ은 ㄷ으로, ㅍ은 ㅂ으로 쓰면 된다는 말이다. '배곶'과 '갗(가죽)'의 받침 ㅈ과ㅊ을 모두 ㅅ으로 표기한다고 예시한다. 이 규정은 1446년에 발간된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을 통해 공포된다. 

왕이 주도한 두 간행물에서 누가 감히 첫 맞춤법 규정을 어겼을까? 세종 아닌 다른 인물을 생각하기 어렵다.

세종이 자신의 맞춤법 원칙을 지키려 한 흔적은 '월인천강지곡'을 교정한 과정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제본을 앞두고 여러군데 받침이 고쳐진다. ㅅ이 ㅈ과 ㅊ으로 수정되고 ㄷ은 ㅌ으로, ㅂ은 ㅍ으로 바로잡힌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수정 획을 새겨서 받침 위에 도장 찍듯 추가하는 것이었다. (안병희,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에 대하여')

세종은 왜 팔종성 이외의 받침을 고집했나? 세종의 간행물에서 '기타 자음'은 '빛(光)' '낱(個)' '깊다(深)' '높다(高)'처럼 어간을 살리는 데 받쳐졌다. 어간을 분리해 표기하는 방식은 '눈에' '안아' '담아' '남아'와 같은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편찬한 신하들의 맞춤법 주장에는 한 발 물러섰지만 자신의 맞춤법 이론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의 간행물에서는 이를 관철한 것이다. 이 맞춤법은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에서 "깊다에서ㅍ을 적는 것은 이것이 본음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한 1906년에야 비로소 인정받게 됐다. 

당대에 한글은 큰 업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한글 창제는 중화주의를 거스르는 사건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에 전혀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백우진은 글쓰기 강사로 활동한다. 책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 『글은 논리다』를 썼다. 호기심이 많다. 사물과 현상을 관련지어 궁리하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글을 많이 쓴다. 경제·금융 분야 책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주식투자법』, 『안티이코노믹스』, 『한국경제실패학』을 썼다. 마라톤을 즐기고 책 『나는 달린다, 맨발로』를 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