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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스웨덴 발렌베리가 수장의 ‘하키스틱 성장’ 투자 철학

이재우 sinemakid222@gmail.com 2024-11-25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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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스웨덴 발렌베리가 수장의 ‘하키스틱 성장’ 투자 철학
▲ 스웨덴 유수의 발렌베리가(家) 일원인 야곱 발렌베리(인베스터AB 회장)의 경영 철학은 가문의 모토인 ‘에세 논 비데리(Esse non videri)’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세 논 비데리’는 라틴어로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발렌베리>
[비즈니스포스트] 매달 만원 가량을 스웨덴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밝히자면, 필자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를 구독하고 있다. 

2006년 스웨덴 청년 다니엘 에크(Daniel Ek, 당시 23세)가 동료들과 함께 창업한 스포티파이는 ‘팟캐스트의 넷플릭스’로 불리면서 순식간에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유료 구독이긴 하지만, 필자의 귀는 스웨덴 회사 덕에 하루가 즐겁다.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태보자. 

스포티파이는 창업 12년 후인 2018년 4월 3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는데, 이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거래소 측의 실수로 건물 외벽에 스웨덴 국기가 아닌 스위스 국기를 내건 것이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스포티파이는 스웨덴 기업인데, 스위스 국기로 월스트리트에 선을 보이게 됐다”(Spotify Is Greeted by Wall Street With a Swiss Flag, Even Though It’s From Sweden)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거래소는 재빨리 스위스 국기를 스웨덴 국기로 바꿔 걸었다. 거래소 대변인은 “우리가 오늘 작은 실수를 했다”고 사과했다. 

과거 1960년대 영국 록그룹 비틀즈가 첫 미국 공연을 하면서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스포티파이의 성공을 보면 ‘스웨덴 침공’쯤으로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필자의 몸에는 또 다른 스웨덴 기업의 ‘그 무언가’가 침투해 있다. “무슨 말이냐?”고 또 물을 수도 있겠다. 밝히자면, 필자는 코로나 사태 당시, 스웨덴 기업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가 만든 백신을 맞았다. 그것도 여러 차례. 

사실 아스트라제네카는 1998년 12월 스웨덴 제약사 아스트라와 영국 제네카의 합병으로 탄생한 기업이다. 당시 유럽의 기업 환경은 치열한 경쟁 압력으로 인한 합병의 물결이 거셌다. 

두 경쟁사가 국경을 넘어 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합치면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합병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합병한 아스트라제네카의 본사는 영국에 뒀고, 수장은 아스트라 측 경영자가 맡았다. 

스포티파이와 아스트라제네카 외에 우리 주위에선 스웨덴 기업을 여럿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의류 브랜드 H&M의 옷을 입고, 이케아(IKEA) 가구를 구입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선 종종 스카니아(Scania)라고 적힌 대형 트럭을 마주한다.

최근엔 대기업에 스웨덴 자본까지 들어와 있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계열인 유럽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EQT(EQT파트너스)다. EQT가 국내 2위 보안업체 SK쉴더스(옛 ADT캡스)의 지분을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된 건 지난해 3월이다. 

EQT는 올해 8월에는 한국의 폐기물 재활용 플랫폼인 KJ환경 및 계열사까지 인수했다. 25개 나라가 넘는 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EQT의 운용 자산은 2300억 유로(337조 1700억 원)가 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EQT를 지원하는 투자 지주회사가 발렌베리 가문의 핵심 축인 인베스터AB다. 

인베스터AB의 수장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야곱 발렌베리(Jacob Wallenberg·68) 회장이다. 그는 유럽 최대의 비즈니스 제국인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 발렌베리가(家)는 미국의 록펠러 또는 로스차일드 가문쯤으로 보면 된다. 그런 발렌베리 가문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년 전인 2003년 방문한 적도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한때 스톡홀름 주식시장 총액의 40%를 차지했다. 연 매출은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약 30%에 달했다. 발렌베리 산하의 굵직굵직한 회사만 언급하자면 이렇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스웨덴 발렌베리가 수장의 ‘하키스틱 성장’ 투자 철학
▲ 유럽 최대의 비즈니스 제국 발렌베리 가문은 산하에 선도적인 글로벌 기업들을 상당수 거느리고 있다. <발렌베리>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 중 하나인 에릭슨(Ericsson) △굴지의 제지 회사 스토라엔소 △세계적인 중전기, 자동화 분야의 ABB △오랜 역사와 기술을 자랑하는 베어링 기업 SKF △하이테크 전투기 강자 사브(Saab), △대형 트럭 생산업체 스카니아(Scania) △다국적 항공사 스칸디나비아항공 등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출발은 1세대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André Oscar Wallenberg)가 1856년 북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인 SEB(Stockholm Enskilda Bank)를 설립하면서다. 

2~3세대를 거쳐 4세대 경영자였던 피터 발렌베리 시니어(Peter Wallenberg Sr.)가 2015년 사망하면서 현재는 그의 아들인 5세대 야곱 발렌베리와 야곱의 사촌인 마커스 발렌베리(Marcus Wallenberg)가 가문의 경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야곱과 마커스는 동갑내기다.

이 집안은 전통적으로 ‘투톱 경영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현재는 야곱 발렌베리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의 회장을, 마커스 발렌베리가 금융 부분인 SEB 회장을 맡고 있다. 인베스터AB와 SEB가 발렌베리를 움직이는 양대 바퀴인 것이다. 

그런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들은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와 스웨덴의 100대 부자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이는 가족의 재산 대부분이 발렌베리 재단에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 재단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 관리 방식은 ‘에세 논 비데리(Esse non videri)’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라틴어로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는 창업자의 아들인 2세대 경영자가 ‘스웨덴 세라핌 왕립 기사(Knight of the Swedish Royal Order of the Seraphim)’가 되었을 때 처음 채택한 것으로, 이후 발렌베리 가문의 강력한 가치이자 모토로 자리 잡았다. 

‘에세 논 비데리’는 거울에 비친 발렌베리 가문의 모습이면서 상징어와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발렌베리 가문은 산하에 수많은 글로벌 기업을 거느리고는 있지만 가족 일원들이 기업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일은 없다. 

그저 그들은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데만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 이케아(IKEA)가 절세를 위해 본거지를 네덜란드로 옮길 때도 발렌베리는 스웨덴을 굳건히 지켜왔다. 

게다가 발렌베리의 일원들은 한국 기업에서 흔히 보게 되는 형제간 지분 분쟁이나 재산 문제로 도마에 오른 적이 일절 없다. 그들이 스웨덴을 넘어 유럽에서 존경받는 가문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가문의 5세대 경영자인 야곱 발렌베리의 경영 스타일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05년부터 인베스터AB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스웨덴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공부했으며 JP모건, 모건 스탠리에서 일한 후 발렌베리에 복귀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SEB의 회장을 지냈으며, 특히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코카콜라 이사회의 유일한 비(非) 미국인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스웨덴 발렌베리가 수장의 ‘하키스틱 성장’ 투자 철학
▲ 발렌베리 가문의 대표수장인 인베스터AB 회장 야콥 발렌베리와 SEB 회장 마커스 발렌베리. 맨 오른쪽은 호텔 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피터 발렌베리. <발렌베리>
필자가 야곱 발렌베리에 하나 주목한 건 그의 투자 방식이다. 그는 수익과 ‘더 많은 수익’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그런 경영자는 아니다. 유럽의 견고한 성(城)처럼 그는 확고한 ‘장기 투자의 대가’다. 숨은 보석을 찾아 장기적 성장을 이룰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고수한다. 

그런 야곱 발렌베리는 과거 글로벌 리더십&경영 컨설팅 기업 에곤 젠더(Egon Zehnder)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수익을 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몇 안 되는 자본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제지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은 수익이 나오기까지 15년 또는 2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이런 투자를 합니다.”

사업 특성상 제지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은 드라마틱한 수익 차트를 만들어 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키스틱 성장(Hockey Stick Growth)’이라는 비즈니스 용어로 설명해 보자. 하키스틱 성장이란 느리게 시작해서 갑자기 상승을 경험하는 성장 궤적을 말하는데, 하키스틱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스틱에서 얼음과 맞닿는 평평한 부분을 블레이드(blade)라고 하는데, 이 블레이드 기간(blade period)은 수익이 전혀 발생하지 않거나 손해를 보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블레이드 기간을 잘 극복하면 변곡점을 거쳐 곡선이 위로 향하는 성장을 이루게 된다. 

야곱 발렌베리 회장의 말을 ‘하키스틱 성장’에 대입하면, 제지 회사 투자의 경우 블레이드 기간이 15년~20년(수익이 없거나 손해)이다. 회사 입장에선 블레이드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지만, 야곱 발렌베리 회장은 블레이드 기간의 길고 짧음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장기 투자 철학은 장수하는 가족 기업의 특징이기도 하다. 가족기업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캐나다 HEC 몬트리올의 전략 교수인 대니 밀러(Danny Miller)의 견해를 빌려 보자. 그는 연구자인 아내와 공동으로 집필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가 선정한 장수기업에서 오랜 시간 손실을 감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장수하는 가족 기업들은 수익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다. 가족 기업들은 단기적인 수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이익을 강조한다.”(‘가족기업이 장수기업을 만든다’ 인용, 황금가지)

야곱 발렌베리는 나무(단기 수익)보다는 숲(장기 투자)을 보는 경영자다. 그는 발렌베리 가문이 살아남아 장수하는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멈추는 순간, 따라잡히거나 먹히고 맙니다. (The moment you stop, you’ll be overtaken or taken over.)”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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