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 주도권 다시 이명희에게, 임영록에게 '유통업의 본질' 구현 맡겼다

▲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20년 2월5일 오후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뒤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함께 식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역대급 인사를 통해 칼을 빼든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유통업의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전략실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면서 그 수장에 ‘개발 전문가’로 평가받는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이사 사장을 앉힌 것은 이 회장의 의지가 오프라인, 즉 부동산에 꽂혀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번 조직 개편을 통해 그동안 각 계열사가 오프라인 투자를 비교적 소홀히 했던 기조가 180도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7일 신세계그룹에 따르면 이날 시행된 전략실 조직 개편과 후속 임원인사는 신세계그룹 안에서도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전략실은 신세계그룹의 큰 그림을 그리는 컨트롤타워 조직이다. 신세계그룹이 1993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하면서 탄생한 전략기획실이 모태인데 그동안 이름이 기획조정실, 경영지원실, 경영전략실, 전략실 등으로 바뀌었다가 이번에 다시 경영전략실 간판을 달았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 곳도 바로 전략기획실이었다는 점은 이 조직이 그룹 안에서 갖는 위상이 어떤지 잘 보여준다.

신세계그룹이 8년 만에 전략실의 기능을 강화하며 경영전략실로 개편한 것은 사실상 이명희 회장의 결단으로 읽힌다.

이 회장이 아니고서는 직속 조직인 경영전략실의 수장을 교체하고 기능을 조정하는 일을 결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임영록 사장을 경영전략실장에 발탁한 것은 이런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임 사장은 신세계그룹 계열사 구조로만 보면 정용진 부회장쪽 인사로 볼 수 있다. 정 부회장이 경영을 전담하는 이마트는 신세계프라퍼티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임 사장을 오롯이 ‘정용진 사람’으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임 사장은 1999년부터 신세계 경영지원실 소속으로 10년 넘게 일했으며 이후에도 신세계그룹 경영전략실·전략실에서 일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명희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 사장의 경영전략실장 발탁은 신세계그룹 내부에서도 ‘누구 사람이라 됐다’는 말이 나올 수 없는 인사다”며 “이른바 라인 때문이 아니라 능력으로 실장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의 양대 축인 신세계와 이마트가 유통업계의 격변 속에서 실적이 흔들릴 때도 신세계프라퍼티가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는 점도 이런 평가에 힘을 싣는다.

임 사장의 이력을 보면 이 회장이 이번 인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바가 ‘개발’에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임 사장은 1987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7년 신세계건설 개발영업팀에 입사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다른 대기업 건설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세계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뒤 신세계 경영지원실에서 오래 일하면서 개발 업무만 10년 넘게 맡았다. 2015년부터 이끌어온 신세계프라퍼티 역시 스타필드를 운영하는 회사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을 주된 업무로 한다. 임 사장은 2008년 강원대학교에서 부동산학과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 회장이 임 사장을 직속 부하로 둔 것은 결국 유통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업의 본질’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뜻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과거 신세계그룹이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 허인철 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같은 ‘재무 전문가’를 경영전략실장으로 발탁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임 사장 발탁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 회장의 오빠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과거 임직원들에게 업의 본질을 강조하면서 백화점업의 본질을 부동산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좋은 입지를 선정하는 것이 유통사업 성공을 위한 기초라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신세계그룹은 업의 본질에서 살짝 비껴난 모습을 보였다. 쿠팡으로 대변되는 이커머스 기업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온라인 전환을 시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마트는 이커머스를 강화하기 위해 3조5천억 원을 들여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G마켓)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마트 본사와 매장을 줄줄이 매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 년 동안 진행한 투자는 성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마트는 본업인 할인점사업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SSG닷컴과 G마켓은 적자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세계그룹 주도권 다시 이명희에게, 임영록에게 '유통업의 본질' 구현 맡겼다

▲ 임영록 신세계그룹 경영전략실장 겸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이사 사장(사진)은 신세계그룹 내 '개발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 사장의 경력이 대부분 개발이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신세계그룹이 부동산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이지 않겠냐”며 “온라인에 쏠리던 역량을 다시 오프라인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장이 9월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이마트 수장에 발탁한 한채양 대표이사도 9일 신세계그룹 연수원에서 열린 이마트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회사의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을 이마트 본업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쓸 것이다”며 “한동안 중단했던 신규 점포 출점을 재개하겠다”며 앞으로 역량을 오프라인에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회장이 최근 보여주는 행보는 그룹 경영의 주도권이 이 회장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신세계그룹 안팎의 얘기를 들어보면 9월 진행한 정기 임원인사는 사실상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사장이 승인한 인사를 완전히 바꿔 새 판을 짠 것으로 여겨진다. 이명희 회장이 직접 나서 그룹 인사를 챙기면서 계열사 대표 40%가 물갈이됐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후 두 달 만에 원포인트 인사와 경영전략실 개편 등의 후속 조치까지 대대적으로 진행한 것은 결국 이 회장이 직접 그룹 현안을 챙기고 미래를 위한 재정비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이명희 회장은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에게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를 책임경영하도록 했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며 “책임경영이 아닌 이 회장이 더 강하게 직접 그룹을 챙기는 모습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