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믿지 말자 미국놈, 속지 말자 소련놈, 일어선다 일본놈, 다시 온다 중국놈'. 

과거 일제강점기에서 갓 해방됐을 때 거리에선 이런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데스크리포트 9월] 정의선 현대차 '속앓이', 정부의 미국 인플레법 늑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이 5월2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지역 투자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민초들은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기적 속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셈이다. 

강대국들의 자국 중심주의와 이에 기반한 지정학적 힘겨루기 양상은 80여 년이 지난 21세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에 기반했던 글로벌 경제체제의 종언을 부른 주요 강대국의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속성은 국제정세가 혼란했던 2차대전 직후 세계 상황과 닮아 있다.

요즘 현대자동차그룹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자국 이익우선주의 태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믿지 말자, 미국놈"이라는 해방 초 혼란기에 떠돌았던 말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건설을 비롯해 105억 달러의 미국 투자계획을 발표했을 때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정 회장 뒤에서 공손히 두손을 모으고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 최강국을 이끄는 바이든 대통령은 자국 내 투자를 결정한 정 회장을 향해 "땡큐"를 연발했다. 그러면서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며 지원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단 3달 만에 우습게 되어 버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8월 중순 북미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완화법(감축법)에 서명했다. 

한국에서만 전기차를 생산하는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공장을 짓기 전까지 보조금 혜택을 받을 길이 막혀 버렸다.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전기차는 보조금이 없으면 팔 길이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전기차 판매 2위를 달리고 있어서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한 인플레이션 완화법은 더욱 뼈아플 수밖에 없다. 

정 회장으로선 실망시키지 않겠다던 바이든 대통령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모양새가 됐다.

그 뒤 정 회장이 급하게 2주에 걸쳐 미국 출장을 떠나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 완화법에 기업인 정 회장이 대응할 방법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지지율이 영 시원치 않았다. 바이든의 민주당은 다음 대선에서 영향을 미칠 경합주 주지사 자리뿐 아니라 상하원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 뺏길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변화 대응 등에 천문학적 예산을 지원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인플레이션 완화법을 밀어붙였고 이 덕분에 최근 민주당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다. 

경합주 판세가 박빙 양상으로 흐르고 최소 상원은 다수당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 명운이 달려 있으니 한국 정부가 뒤늦게 '동맹국'이니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니 운운하면서 인플레이션 완화법에 우려를 제기해도 태도를 바꿀 리가 만무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내 반대 세력과 공화당의 반대로 인플레이션 완화법 통과에 애를 먹던 때부터 한국 정부는 신속하게 뛰었어야 했다. 

법 자체를 막을 수 없더라도 한국이 예외 적용을 받도록 법 내용이 공개된 7월부터라도 움직여야 했다.

한국 정부는 워낙 법이 공개된 뒤 신속하게 통과돼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이를 놓고 변명에 불과하다는 시선이 많다.

이제서야 실무자와 장관급 통상교섭본부장이 뛰는 한국 정부와 달리 캐나다와 멕시코는 일찌감치 나섰다. 

결국 보조금 대상 전기차가 법안 논의 초기 '미국 내 생산'에서 최종 '북미 내 생산'으로 바뀌었다. 미국과 붙은 캐나다와 멕시코는 전기차 생산공장을 유치할 여지가 커진 셈이다.

이에 머물지 않고 캐나다는 배터리 원재료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인플레이션 완화법 조건을 충족하려는 국가들과 협력에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제 문제가 정치 혹은 지정학적 안보의 하위 개념이 된 지 오래다. 

국제정치 차원에서 미리 풀지 못하면 통상 차원의 수단을 동원해볼 여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민간 중심, 시장경제원칙'을 강조했다. 정부가 앞장서 나서지 않고 민간을 뒷받침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최근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기류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완화법이 제정되기 전 우리 정부가 미리미리 뛰지 않고 뒤늦게 대응하고 있는 것도 현 시대 흐름과 동떨어진 대통령의 경제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사이 줄타기 대신에 미국 중심 외교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미 '손 안에 든 새' 한국을 배려해 줄 이유가 없다. 

6월 나토정상회의 당시 바이든 대통령이 전야 만찬에서 윤 대통령에게 '노룩' 악수를 한 것은 연유야 어쨌든 이런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정 회장은 못 믿을 미국에 천문학적 투자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미덥지 않은 우리 정부를 놓고 더 깊은 '속앓이'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박창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