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체력 effect] ‘지금’이 제일 행복해야 ‘원더풀 라이프’다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스틸이미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한국에서도 꽤 인기몰이를 하는 일본인 감독이다.

'어느 가족'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동심을 들여다본 영화들이 특히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눈물샘을 기어코 터뜨리기도 했다.
 
나 역시 그의 영화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찾아보는 편이다. 실은 인기를 얻기 전 초기작들을 더 좋아한다. 예를 들면 데뷔작인 '환상의 빛'은 미야모토 테루가 쓴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대개는 영화보다 원작 소설이 훨씬 낫다고 여기지만 이 경우에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소설이 미처 담지 못한 여인의 의구심과 서늘한 통곡을 어쩌면 영화 쪽이 깊숙하게 전달한 듯도 싶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작은 시골 학교 같은 장소에 남녀노소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머물 예정이며 살면서 가장 좋았던 추억을 하나씩 고르는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각자 스케줄에 맞춰 스태프들과 일 대 일 면담을 하면서 예전 기억을 구체적으로 더듬어 나간다. 마치 자기계발을 위해 워크숍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 같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일종의 트릭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고 여기는 평범한 장소가 아닌 일종의 림보이기 때문이다.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까지 머무는 곳 말이다.

죽고 난 뒤의 세상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려준 사람이 없다.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또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저승대왕의 재판이 아니라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스태프들은 사람들이 고른 추억을 당시 상황과 유사하게 재현해 짧은 영화로 만든다.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감상한 뒤 충만한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이런 마지막 선물이 주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다들 천국행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나 사랑했던 청춘의 추억을 고른다. 문제는 아무리 고르려고 애써도 그런 행복함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일주일 내내 전 생애의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지만 도대체 뭐가 행복인지 모르는 이들이다.

영화를 본 김에 만약 나라면 어떤 추억을 고를까 생각해 봤다. 여러분도 한번 고민해 보시라. 언제 적의 추억을 꺼내들 것인가.

영화 속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싶었다. 어릴 적 또는 젊은 시절의 한때가 가장 행복했다면 그 이후의 삶은 대체 뭘까.

내 경우엔 마흔 살 이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원하던 대학에 붙었거나 오랜 맞벌이 끝에 집을 장만한 일은 우선순위에 들지도 못한다. 쉰 넘은 현재 모습과 비교하면 짜릿한 희열이라든가 만족감을 모르던 시시한 삶이었다. 
 
[마녀체력 effect] ‘지금’이 제일 행복해야 ‘원더풀 라이프’다

▲ 영화 '원더풀 라이프' 포스터. 


마흔 이후 내 인생의 변곡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로또가 당첨되어 큰돈이라도 벌었냐고? 하던 일이 성공해서 CEO 직함이라도 달았냐고? 둘 다 아니다. 그저 없던 체력을 꾸준히 키워 강한 육체의 소유자가 되었을 뿐이다.

체력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자존감이 커졌고 해보고 싶은 일이 무진장 많아졌다. 에너지가 넘치고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즐기고 무엇보다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럽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활기찬 중년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어 나가고 있다. 

제대한 아들과 동행해 온종일 교토를 헤매고 다녔던 가족 여행이 기억난다.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몽블랑이나 노르웨이 트래킹도 빼놓을 수 없다. 들판 가득 핀 야생화를 바라보며 만년설로 끓여먹은 라면 맛을 어떤 진수성찬에 비할까.

굳이 멀리 떠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지난달 남편과 혼합 복식으로 배드민턴 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거둔 순간은 얼마나 짜릿했나. 10년 전 트라이애슬론 릴레이 경기를 했을 때처럼 부부가 함께 거둔 쾌거였다. 

어제 아침에도 배드민턴을 치면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아니, 오늘처럼 사이클을 타고 한강 자전거 길을 쌩쌩 달렸던 순간을 골라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내일부터 더 재미난 일들이 많이 생겨서 지금까지 나열한 추억들은 저 아래 후순위로 밀릴지도 모른다.

'원더풀 라이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지금, 그리고 앞으로가 더 행복한 추억이 되는 인생을 살자고. 시시한 과거 따위에 매여 있지 말고 내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더 신나게 살아 보자고.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원더풀 라이프’가 아니겠는가. 마녀체력 작가
 
작가 이영미는 이제 ‘마녀체력’이란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27년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았다.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대편집자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지만, 갈수록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 갔다.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15년간 트라이애슬론으로 꾸준히 체력을 키워 나갔다. 그 경험담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주제로 묶어 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에디터에서 작가로 변신했으며 <마녀체력> <마녀엄마> <걷기의 말들>을 썼다. 유튜브 지식강연 '세바시'를 비롯해 온오프라인에서 대중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