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증권 등 3개 금융계열사 매각···금융업 철수 초강수
그룹 규모 축소 불가피···현대 엘리베이터도 빨간 불
시장의 우려·채권단 압박···금융업 매각 장기화 가능성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시장의 ‘유동성 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해 ‘금융업 철수’라는 초강수를 뒀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현대그룹이 ‘제2의 동양’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900%에 이르는 부채비율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현 회장은 부채비율을 확실하게 줄이고 대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2일 현 회장은 ‘현대증권 등 3개 금융계열사 매각’을 뼈대로 하는 자구계획안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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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좌)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우) |
22일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등 3개 금융사 매각과 현대상선 자산 처분을 통해 모두 3조3000억원 가량의 유동성을 확보하겠다는 자구계획안을 발표했다. 이중 1조3000억원 가량은 부채 탕감에 사용하고 2조원은 유동성으로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현대그룹은 특히 1조3000억원 정도의 부채 상환으로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지스틱스 등 주료 3개사의 부채비율이 493%(3분기 말 기준)에서 200% 후반대로 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우선 현대증권, 현대자산운용, 현대저축은행 등 3개 금융계열사를 모두 매각해 7000억~1조원 이상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현대상선이 보유한 항만 터미널 사업의 지분 일부를 매각하고 벌크 전용선(건화물 운반선) 부문의 사업 구조 조정을 통해 약 1조5000억원을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상선이 보유한 선박, 유가증권, 국내외 부동산 등도 4800억원에 매각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현대상선 외자유치,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 현대로지스틱스 기업공개(IPO), 반얀트리 호텔 매각 등을 추진해 6600억원을 마련키로 했다.
◆현대그룹, 다운사이징 어디까지
이번 자구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금융업 철수’다. 현대그룹의 자구안대로 금융 부문이 철수하게 되면 현대그룹은 해운(현대상선), 산업기계(현대엘리베이터), 육상물류(현대로지스틱스), 대북사업(현대아산) 등 4가지 사업부문을 재편된다. 사실상 해운 중심의 소규모 그룹으로 재편되는 셈이다. 그룹 외형은 이전보다 더욱 줄어들게 된다.
고 정주영 회장 체제의 현대그룹에서 2000년 현대자동차 등이 분리되면서 만들어진 지금의 현대그룹은 이후 그룹 규모가 계속해서 축소돼 왔다. 2001년에는 유동성 위기를 맞아 현대건설과 현대정유,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등의 우량 계열사들이 채권단의 손에 넘어갔다. 현대중공업과 같은 굵직한 계열사의 분리도 이어졌다. 그리고 올해 현대그룹은 금융계열사들을 정리하며 또다시 규모 축소가 불가피해졌다.
문제는 앞으로다. 그룹 주력계열사인 현대상선이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순환출자 구조로 엮인 여타 계열사들에게도 피해가 전가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대엘리베이터의 상황은 위태롭다. 지난 2006년 현대자동차그룹 등 범현대가가 현대상선 지분 29%를 보유하면서 경영권 유지가 위험해지자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 및 현대증권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대신증권 등 9곳과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체결했다. 대신증권 등이 현대상선의 주식을 사는 대신 주가 하락시 현대엘리베이터가 손실을 보전해 주는 조건이었다. 파생상품 계약 체결로 대신증권 등이 현대상선 지분 16%를 사들이면서 우호 지분을 늘린 현 회장은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계약조건이 현대엘리베이터에 엄청난 손실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해운업 침체 장기화로 현대상선의 주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보전 손실액수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7일까지 현대엘리베이터의 파생상품 평가손실액은 4450억원에 이른다. 이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700억원)의 6배가 넘는 규모다. 현대상선의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르기 전까지 손실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자본잠식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룹 측은 “외형은 줄어 들었지만 주요 사업에 집중하며 내실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추후 그룹의 외형 확장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침체된 해운시장 상황이 당분간 회복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남북간 관계 회복 역시 불투명하다. 그룹의 희망찬 계획과는 달리 그룹의 외형 확장은 앞으로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 ‘제2의 동양’ 아니다...초강수 작전
이번 결정의 바탕에는 시장의 우려와 채권단의 압박이 있다. 지난 9월 ‘동양사태’ 이후로 시장에서는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대기업들이 ‘제2의 동양’ 후보로 거론됐다. 현대그룹은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지난달 경제개혁연구소는 2007년 이후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연속 지정된 40개 그룹의 연결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이들 대기업들의 재무구조를 진단한 결과를 발표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연결부채비율이 200%를 넘고,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을 부실(징후) 그룹으로 판단했으며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특히 부실 정도가 심한 4개 그룹으로 현대그룹, 한진그룹, 두산그룹 그리고 동부그룹을 꼽았다. 해당 조사 결과 “현대그룹은 연결부채비율이 895%에 이르며, 2년 연속 영업이익 적자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경제개혁연구소는 분석했다. 한진그룹과 두산그룹, 동부그룹의 연결부채비율도 각각 678%, 405%, 398%에 달했다.
이런 발표가 뒤따르자 해당 기업들에 대한 시장의 유동성 우려와 채권단의 압박 또한 커져갔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동부그룹과 한진그룹은 3조원대의 자구안을 서둘러 발표했다. 현대그룹 역시 3조 3천억원대 자구안을 내놨다.
사실 현대그룹 채권단은 고강도 자구계획으로 그룹 위기의 진원지인 현대상선 매각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정은 회장은 그룹의 근간이자 순환출자 고리에 엮여있는 현대상선을 매각하게 되면 그룹 전체가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은 그 대안으로 순환출자구조에서 자유로운 현대증권 카드를 선택했다.
동부그룹과 한진그룹이 ‘통 큰’ 자구안을 내놓은 것도 현 회장이 현대증권 카드를 빼들 수밖에 없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달 동부그룹은 주력사업인 반도체(동부하이텍)와 합금철(동부메탈)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한진그룹 역시 창사 이래 최대 지분투자였던 에쓰오일의 지분매각을 선언했다. 비슷한 상황의 기업들이 오랫동안 공들였던 주력사업들을 포기하는 등의 강력한 자구안을 발표한 만큼, 현정은 회장 역시 그에 상응하는 초강수가 필요했고 그것이 ‘금융부문 철수’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금 보유 상황이) 내년 상반기까지는 충분한 상황이지만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선제적이고 자발적인 고강도 자구안을 마련했다”며 “이런 조치에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서도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와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번 자구안의 실현 가능성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M&A 시장에 우리투자증권, 동양증권 등 대형 매물이 이미 나와있는 상황에서 현대증권이 제값에 팔리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이들은 특히 경쟁사 대비 높은 인건비용과 낮은 생산성, 계열사들의 가치 하락 등 장애 요인이 많아 그룹 측이 가격을 낮추지 않는 이상 매각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