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국유 철강 기업 발해철강의 톈진 공장 모습. <연합뉴스>
내수 침체로 갈 곳을 잃은 중국산 제품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역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국내 관련 기업들의 유동성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계속해 나오는 가운데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사업개편에 착수했다.
국내 철강 업계도 수익성이 크게 악화하며 잇단 공장 폐쇄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중국 부동산 경기 부진으로 철강 내수 수요가 줄어든 가운데 중국산 저가 공세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긴 불황의 늪에서 탈출한 국내 조선 업계는 LNG운반선 분야에서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실적과 수주 양 측면에서 모처럼 웃은 한 해였다. 다만 다수 탱커선, 컨테이너선 일감을 내주며 중국 조선업계와 점유율 경쟁에서 계속 밀리고 있어 이같은 호황이 아주 길게 가지 못할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 저가 중국산 철강 범람에 잇단 공장 폐쇄, K철강 역대급 위기
국내 철강 업계는 올해 중국산 저가 철강 제품에 시장을 빼앗기며 수익성 악화 일로를 걸었다.
수익성이 크게 악화한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중국 철강산업의 지속된 불황으로 반등의 여지는 제한적이었다.
세계 철강 가격의 주요 결정 요인인 중국 부동산 경기침체가 지속돼 중국 철강의 내수 수요는 올해 내내 약세에 머물렀다. 연간 총 생산량이 10억 톤에 달하는 중국 철강산업이 내수 침체로 해외로 눈을 돌리자, 한국 철강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의 올해 1~10월 누적 철강 수출량은 9189만 톤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3.3% 증가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올해 1~11월 수입된 중국산 철강재는 817만8천 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3% 증가했다.
국산 철강재보다 가격 경쟁력이 앞서는 중국산 철강이 범람하자 포스코,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업체들은 수익성 개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제철, 포스코홀딩스(철강 사업 부문), 동국제강 등 주요 철강사의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각각 77.5%, 45.4%, 79.6% 줄었다. 3년째 바닥을 치고 있는 국내 철강사들 이익이 2024년에도 크게 후퇴한 것이다.
코너에 몰린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사업 구조조정 등의 자구책을 실시하고 있다.
포스코는 중국 포스코장가항불수강(PZSS) 제철소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회사의 첫 해외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인 PZSS는 올해 3분기까지 10개 분기 연속 적자를 내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또 45년 9개월간 가동했던 포항제철소 1선재 공장을 폐쇄하고, 쇳물의 성분을 조정하는 포항 1제강공장도 지난 7월 문을 닫았다. 중국발 철강 공급과잉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현대제철도 역시 최근 제강·압연 공정을 진행하는 포항 2공장 폐쇄를 결정하며, 구조조정 행렬에 동참했다.
구조조정 노력에도 중국 부동산 경기가 내년에도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어서 내년에도 철강 기업 실적 반등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반적인 관측이다.
세계철강협회(WSA)는 세계 철강 수요가 최근 3년간 감소에 따른 기저효과에도 2025년 1.2% 성장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물가 진정과 통화정책 완화 기조는 철강 수요에 긍정적이나, 단기간 주요국 건설경기 침체 여파 등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중국의 부동산발 철강 내수 침체가 길어지고 있는 것이 시황 개선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익수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은 "국내 철강 수요도 건설경기 냉각과 제조업 생산 둔화로 부진한 흐름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트럼프 정부 재집권에 따른 통상압력 상승이 철강 업계의 또 다른 위험 요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 연구원은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는 철강 수출 환경의 통상 리스크로 작용한다"며 "대선 공약인 보편적 관세, 상호무역법 등은 수입 할당제(쿼터)에 이은 추가 대미 수출 제재와 함께 상대국 보복 조치에 의한 수출시장 전반의 규제 강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지속된 세계 설비증설과 이에 따른 공급과잉이 지속되며 2024년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LG화학의 여수 공장 모습. < LG화학 >
중국발 저가 공세로 구조적 불황에 빠진 석유화학 업계는 올해도 업황이 반등하지 못하며 벼랑 끝에 내몰렸다.
각 기업들은 석유화학 기초유분 사업 비중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사업구조 개편을 추진하는 등 미래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정부는 12월 말 구조조정 촉진방안을 발표하며 지원에 나섰다.
대표적 석유화학 제품인 에틸렌 스프레드(원료인 납사가격과의 차이)는 올해 1~3분기 평균 1톤당 169달러로 통상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300달러를 연중 내내 크게 밑돌았다.
이는 2019~2022년 평균 연산 1100만 톤, 2023년에는 768만 톤, 2024년 613만 톤 등 글로벌 에틸렌 생산설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발생한 공급과잉의 여파에 따른 것이다.
특히 주요 수출상대국이었던 중국이 자급화율을 높이고 수출물량을 늘리자 롯데케미칼, LG화학, 여천NCC, HD현대케미칼, SK지오센트릭, 효성화학 등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체질개선에 주력했다.
3년 연속 수천억 원의 적자를 낸 롯데케미칼은 전지소재, 첨단소재, 수소에너지 등의 사업 분야를 키우고, 비핵심자산을 매각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의 중장기 전략을 지난 7월 발표했다.
LG화학은 바이오·서스테이너블리티·전지소재 등 3대 신성장동력 사업을 키우고, 여수2공장 나프타분해설비 매각을 추진중이다. 다만 전지소재 사업은 전기차 시장의 성장둔화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여수2공장 매각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해를 넘기게 됐다.
올해 부채비율이 급등한 효성화학은 특수가스 사업부문을 매각해 급한 불을 꺼야했으며, 여천NCC도 부채비율이 늘어나면서 일부 회사채의 특약사항인 재무비율 유지 여부에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온다.
세계 석유화학 설비 증설량은 2025년 일시적으로 둔화됐다가, 중국·중동을 중심으로 2026년부터 다시 가파르게 상승할 예정이다. 2025년이 석유화학 업계 구조조정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지적이다.
▲ 국내 주요 산업계가 중국 저가 공세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조선업계는 호황 사이클에 본격 진입하면서 실적과 수주 모두 순항하는 한 해를 보냈다. 사진은 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와 국내 조선업계 주력선종인 LNG운반선의 모습. < HD현대중공업 >
특히 2023년 각 사의 적극적 외국인 인력수급 조치가 올해부터 효과를 내기 시작하며, 조선소 현장의 생산 안정화를 이룬 것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주요 원재료인 후판 가격도 약세가 지속돼 조선사 수익성 개선에 보탬이 됐다.
HD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삼호가 10% 안팎의 영업이익률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맏형 HD현대중공업까지 영업이익률을 5%대까지 끌어올리는 등 양사가 전사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적자를 내던 HD현대미포도 2분기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삼성중공업 역시 2023년 8년 연속 적자탈출에 성공한 뒤, 올해 실적 개선세가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저가 수주물량이 해소되고 2021년부터 수주한 높은 선가의 물량이 건조에 들어가면서다.
다만 지난해 5월 한화그룹에 인수돼 출범한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은 올해 호황 사이클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 대우조선해양 시절 수주한 저가 물량과 일부 호선에서 발생한 외주비 등 생산일정 조정비용 등 생산 안정화 비용이 발생하면서 예상보다 수익성이 더디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주 측면에서도 주요 조선 3사 모두 올해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았다.
HD한국조선해양 3사는 올해 11월까지 합산 240억6900만 달러를 수주해, 연간 수주목표의 152.1% 수준을 달성했다. 각 계열사별로 주력 선종을 높은 선가에 수주하면서 미래 일감을 든든히 확보한 것이다.
올해 연간 수주목표를 공개하지 않은 한화오션은 올해 88억6천만 달러를 수주했다. 지난해 한화그룹 인수절차 등으로 다소 저조했던 수주실적(35억2천 만 달러)의 2배 이상을 해낸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올해 73억1200만 달러를 수주했다. 전체 수주목표인 97억 달러에 미치지 못하지만 상선 부문만 놓고보면 수주목표 68억 달러를 넘겼다. 해양 부문의 코랄 술 FLNG 프로젝트(25억 달러 추정)는 선수금을 받고 초기 설계에 들어가는 등 계약체결만 앞둔 상황이다.
다만 중국 조선 업계와 수주경쟁에서 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도 1~11월 수주점유율은 한국 18%, 중국 69% 등으로 양국 점유율 격차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포인트나 벌어졌다.
가스운반선에서는 국내 조선사들이 기술 우위를 통해 중국에 앞섰으나 대형 탱커선(유조선), 컨테이너선 등을 중국 조선소들이 대거 수주하면서 점유율을 확대한 것이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대형선 시장 점유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은 중국산 선박의 품질이 올라간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대형 탱커 등의 수주점유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력을 안정화하고,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성근·신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