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회의에서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비즈니스포스트]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별세한 지 6년이 된 가운데 반도체 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선제적 투자와 미래 기술에 관한 통찰이 재조명되고 있다.

삼성은 23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가족 선영에서 이 선대회장의 6주기 추도식을 지켰다고 밝혔다.

추도식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가족,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겸 대표이사 부회장과 노태문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 겸 대표이사 사장 등 주요 삼성 계열사 사장단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 회장은 이날 오전 6시30분경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귀국한 뒤 곧바로 8시40분경 선영에 도착해 약 15분 동안 참배했다.

참석자들은 추도식 이후 경기 용인시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오찬을 함께하며 고인을 기렸다.

◆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1위로, 불황에도 멈추지 않은 투자

이건희 선대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기술혁신을 통해 삼성의 국제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대한민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4년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개인 재산을 투자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의존했고, 세계 반도체 업계도 불황과 구조조정에 직면해 있었다.

삼성 내부에서도 사업 성공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됐지만, 이 선대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뒤 삼성은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선언을 계기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삼성은 반도체 공장 건설 기간을 통상 18개월 이상에서 6개월로 단축하고,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선진 업체와의 기술 격차를 좁혔다.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으며, 이듬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사업 진출 약 20년 만에 미국과 일본 기업이 주도하던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불황에도 투자를 이어간 선제 대응은 삼성의 경쟁력을 뒷받침했다.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생산설비를 확대할 때 삼성은 6인치 웨이퍼로 전환했고, 1987년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 불황으로 투자를 줄이는 상황에서도 신규 생산설비를 구축했다. 그 뒤 8인치 웨이퍼 양산 체제를 선제적으로 마련하는 등 차세대 기술과 생산능력 확보에 주력했다.

이 같은 투자 기조는 기술력과 원가 경쟁력, 생산능력에서 후발 업체와의 격차를 벌리는 토대가 됐다. 삼성전자는 2026년 2분기 기준 글로벌 D램 시장에서 39.4%,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29.3%의 점유율로 각각 1위를 기록했다.

이에 반세기 전 반도체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선택한 결단이 인공지능(AI) 시대에도 핵심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3일 경기도 수원 선영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6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30년 전 AI·로봇 시대를 내다본 통찰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뿐 아니라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로봇 등 첨단기술이 산업의 미래를 바꿀 것으로 내다봤다.

1987년 삼성전자 회장 취임 이후 전자·정보기술이 기존 제조업과 결합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도 전자기술과 결합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도 주목했다.

로봇 역시 단순한 생산 자동화 설비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산업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기술로 바라봤다. 1990년대에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하면 인간에게 창조적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통찰은 생성형 인공지능(AI)과 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 등으로 이어지는 최근 산업 변화와 맞닿아 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성능 메모리와 저장장치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미래 기술의 변화를 일찍 포착하고 관련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이 다시 주목받는 배경이다.

삼성전자 측은 "이 선대회장이 강조했던 미래 기술에 대한 선제적 준비가 새로운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되고 있다"며 "이 선대회장이 30년 앞서 미래를 내다본 것"이라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