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권영진은 1962년 12월10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때 인연으로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1999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요청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원외 신분으로 남경필, 김영선 의원 등 당시 초선의원들과 함께 한나라당 소장파 그룹 ‘미래연대’를 결성하고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 동안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보좌직을 수행했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연설원고를 쓰며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줄곧 '이명박 대통령의 등 뒤를 지켜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한나라당 미래연대 공동대표로서 천막당사 운동을 주도했다. 그뒤 2005년까지 한나라당 혁신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서울시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을 도와 43세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게 된다. 서울시장 재직시절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언론과 시의회 등으로부터 정무부시장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자원회수시설 광역화, 용산 부지에 있는 자연생태공원 보존 등을 진행했다.

대표적 친이명박계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후보의 노원을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2008년 제18대 국회희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4년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6.4 지방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언변과 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는다. 몇 차례 선거를 치르며 신문과 TV토론에서 노출됐는데 그 때마다 대체로 평가가 좋았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하며 쌓은 행정경험과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경험, 서울디지털대 행정학과 교수 등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2012년 대선 캠프에서 전략조정단장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략가로 통한다. 선거 중반 정수장학회와 과거사 논란 등으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흔들릴 때 사과와 국민대통합 방안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벌인 토론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 대통령의 방패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18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내 중립 성향의 쇄신파로 김성식, 김성태 의원 등과 함께 `민본21'을 주도하는 등 개혁성향이라고 평가받는다.

대구시장 당선 뒤 '현장소통시장실'을 운영하고, 시민이 정책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원탁회의'를 여는 등 대구시민과 소통에 힘쓴다는 평가를 듣는다.

해외기업들과 업무협약을 맺어 대구지역의 산업 발전에 힘쓰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권영진은 물산업과 로봇산업 등 첨단산업을 유치해 대구의 산업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위해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5년 10월 독일의 로봇제조 기업인 “KUKA’와 로봇산어 분야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KUKA는 앞으로 지역의 우수인력을 고용하고 첨단로봇 제조시설 건립을 검토하기로 했다. 독일 보쉬 엔지니어링에도 지역기업과 협력을 요청했다.

노사협력에도 힘쓰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2015년 대구시 산하 4개 공사와 공단이 임크피크제 도입에 합의하도록 하기 위해 추석연휴에 직접 찾아 협조를 구했다고 전해졌다.

대체적으로 ‘젊은 시장으로서 개혁과 변화의 적임자’라는 반응이긴 하나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단점도 있다.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대구 취수원 이전 문제를 놓고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지 않아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동희 대구시의회 회장으로부터 각종 활동을 통한 시정 발전 분야의 피드백이 부족했고 미술관 건립 추진과정이나 대구 취수원 이전, 남부권 신공항 건설과 관련해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대구시 고위직이나 출자·출연기관 대표로 고려대 출신 인사를 잇따라 임명해 ‘자기 사람 챙기기’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2000년부터 한나라당 총재실 총재보좌직을 수행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2006년 한나라당 오세훈 서울시장후보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오세훈 시장 당선 이후 초대 정무부시장을 역임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의 노원을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서울 노원구 을에 출마하여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교육기회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교육복지법안을 발의했으며 창동차량기지 이전을 추진했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원식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패한 뒤 2014년 새누리당 대구광역시장 후보경선에 출마했다.

당시 새누리당의 보수적인 대구 당원들이 친박계의 심장격인 대구에서 친이계라 할 수 있는 권영진 후보를 당선시킨 데 대해 정계에 적지 않은 여파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여권의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대구가 여권 변화의 시발점이 됐다는 해석이 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3대 목표와 5대 혁신과제, 7대 핵심과업을 주요 정책으로 하는 ‘357’공약을 내세우며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제치고 대구시장으로 당선됐다.

경제살리기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대구를 창조경제수도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교육시장을 표방하며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문화도시 계발을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도 남부권 신공항건설 유치와 민생현장 시장실, 물산업 클러스터 조성, 첨단공구산업 기술고도화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10월 전국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들로 구성된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부회장에 선임됐다.

7년 째 지지부진한 대구 취수원 구미 이전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대구취수원 이전문제는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사건과 거듭된 오염사고로 낙동강을 수돗물 원수로 사용하는 대구시민들의 불안감 증폭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미시가 이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고 정부도 미온적 자세를 보여 진행이 되지 않았다.

2016년 신년사에서 대구와 경북이 역할분담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밝혔다. 첨단의료복합단지에 제약회사의 연구소 뿐만 아니라 제조설비를 본격적으로 입주시키겠다고 밝혔다. 또 경북대 후문, 동성로, 동대구로를 청년문화 특화거리로 조성해 청년읜 열정이 모이는 대표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 학력

안동에서 안동부설초등학교와 경안중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대구에 유학와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 1986년 학사학위를 받고 같은 학교에서 1990년 정치학 석사학위와 1998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권삼석 안동시 시의회 초대 의장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이정원씨 사이에 아들 두 명을 두고 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 당시 그의 청년 지지자들이 ‘권 병장, 나라를 지켜줘! 아빠는 걱정 말고. 우리가 영진이형 지킬게!’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유세에 나서면서 당시 군대에 있던 장남이 유명세를 탔다.

장남은 2014년 7월 말 전역 후 복학해 현재 대학생이며, 둘째 아들은 아직 고등학생이다.

◆ 상훈

2008년과 2010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시상식에서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상을 받았다.

◆ 상훈

2008년과 2010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시상식에서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상을 받았다.

어록


"이번 회의에서 제안된 정책과제는 대구시 경제정책에 적극 반영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 (2016/01/21 2016년 지역기업의 현장목소리를 듣기위한 점검회의에서)


“올해는 경북도지사, 구미시장과 함께 전면에 나서 대구 취수원이전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 지난해 민·관협의회 협의과정에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면서 “하지만 일각에선 민·관협의체에 맡겨 시간만 보낸다는 의견도 적잖았다. 올해는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다. 정부도 뒷짐만 지지 말고 적극 나서야 한다.” (2016/01/06 시청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치단체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인정하고 살려야 지방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방분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2015/10/30 전국시도지사협의회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대한민국의 독립이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고통과 희생 속에서 이뤄졌듯이 정치를 한다는 것, 특히 지방 도시를 살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지방 도시의 여건이 그렇습니다.” (2015/01 언론인터뷰에서)

“시장이 주말에 쉬지 않는 것, 저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직급이 높고 역할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젊은 직원들과 똑같이 주말을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직급이 높아지고 역할이 커지면 그만큼 책임감도 막중해지는 거죠.” (2015/01 언론인터뷰에서)

“사람과 돈과 투자가 몰리는 자랑스러운 대구 건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2015년 신년사 중)

“외국인 관광객을 보다 많이 수용하기 위해서 현 대구공항만으로 한계가 있다. 동남권 신공항을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 (2014/12/22 언론인터뷰에서 체류형 관광블록에 대해 언급하며)

“시민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시장이 아무리 잘나면 뭐합니까? 시장이 하고자 하는 걸 시민들이 모르는데 시장이 하는 거 내 일하고 무슨 상관있냐고 시민들이 얘기하는데 그 시장이 시민의 에너지를 가지고 대구를 혁신하고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시민 속에 들어갈 겁니다. 시민 속에서 제 비전을 공유하고 시민들의 에너지를 모아서 내 비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시민 속의 시장, 시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시민 속의 시장 되겠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 대구시장 후보 캠프 개소식에서)

“친박은 박근혜 정치의 지극히 작은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속에 비친 친박의 나쁜 그림자를 지우는 일도 박근혜 후보의 중요한 숙제중의 하나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기획단 기획위원 시절 언론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선거에 패배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앞으로도 지는 선거는 하지 않을 것이다.” (2008/06 초선의원 당선 시절 2004년 총선에서 졌을 때를 회상하며 언론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여의도식 정치라고 불리는 구태 정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큰 방향은 좋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 민주화시대에 방향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쇠고기 파동도 정권이 사소한 과정 관리를 못해서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게 아니냐." (2008/05 초선의원 당선 시절)

◆ 사건/사고

대구시장에 당선된 뒤 김범일 전 대구시장이 추진해온 주요 문화사업을 두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지역 문화계에서 큰 논란이 일자 사과했다.

◆ 평가

언변과 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는다. 몇 차례 선거를 치르며 신문과 TV토론에서 노출됐는데 그 때마다 대체로 평가가 좋았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하며 쌓은 행정경험과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경험, 서울디지털대 행정학과 교수 등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2012년 대선 캠프에서 전략조정단장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략가로 통한다. 선거 중반 정수장학회와 과거사 논란 등으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흔들릴 때 사과와 국민대통합 방안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벌인 토론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 대통령의 방패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18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내 중립 성향의 쇄신파로 김성식, 김성태 의원 등과 함께 `민본21'을 주도하는 등 개혁성향이라고 평가받는다.

대구시장 당선 뒤 '현장소통시장실'을 운영하고, 시민이 정책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원탁회의'를 여는 등 대구시민과 소통에 힘쓴다는 평가를 듣는다.

해외기업들과 업무협약을 맺어 대구지역의 산업 발전에 힘쓰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권영진은 물산업과 로봇산업 등 첨단산업을 유치해 대구의 산업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위해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5년 10월 독일의 로봇제조 기업인 “KUKA’와 로봇산어 분야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KUKA는 앞으로 지역의 우수인력을 고용하고 첨단로봇 제조시설 건립을 검토하기로 했다. 독일 보쉬 엔지니어링에도 지역기업과 협력을 요청했다.

노사협력에도 힘쓰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2015년 대구시 산하 4개 공사와 공단이 임크피크제 도입에 합의하도록 하기 위해 추석연휴에 직접 찾아 협조를 구했다고 전해졌다.

대체적으로 ‘젊은 시장으로서 개혁과 변화의 적임자’라는 반응이긴 하나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단점도 있다.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대구 취수원 이전 문제를 놓고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지 않아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동희 대구시의회 회장으로부터 각종 활동을 통한 시정 발전 분야의 피드백이 부족했고 미술관 건립 추진과정이나 대구 취수원 이전, 남부권 신공항 건설과 관련해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대구시 고위직이나 출자·출연기관 대표로 고려대 출신 인사를 잇따라 임명해 ‘자기 사람 챙기기’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 기타

역대 가장 젊은 대구시장이다.

비박근혜계 인물로 예전에 친이명박계 인사로 통했다. 박근혜 대통령 대선캠프에서 전략조정단장으로 활동하긴 했지만 친박계 인사들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 당내 평가다.

대구시장 취임 뒤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이유정의 패션쇼 런웨이에 서는 등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을 좋아해 정치인이 안 됐으면 체육선생님이 됐을 거라고 말할 정도다. 축구는 물론 족구, 탁구, 농구, 테니스, 배드민턴, 당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교시절 학교수업을 빼먹은 채 서울에서 열리는 모교 축구경기 응원하러 갔다 들켜 벌을 선 일화도 있다.

토론을 좋아하며 이야기할 때 손동작이 반드시 들어간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토론 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하려다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말을 하다 탄력을 받으면 시간을 넘겨 다음 일정에 차질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해진다.

전국 최초로 대학원 총학생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고려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통일정책보좌관으로 근무하다 1999년 정치계에 발을 들일 때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아버지가 “(정치인이 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하던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2004년 총선에 출마했을 때 당시 탄핵의 역풍을 맞아 2천 표 차이로 진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