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이진복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하는 윤석열정부의 첫 번째 정무수석으로서 대통령실과 국회를 매끄럽게 연결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1957년 음력 10월18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 기계공업고등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김영삼정부에서 대통령실 민정비서실 행정관을 거쳤다.

부산 동래구청장을 지내고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19대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되며 내리 3선을 했다. 20대 국회 전반기에 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새누리당이 분당하는 과정에서 탈당 행렬에 동참해 바른정당에 합류했다가 2017년 대선 직전 복당했다. 탄핵사태에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새누리당 전략기획본부장과 미래통합당 2020년 4·15 총선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당내에서 전략 전문가로 꼽힌다.

성격이 원만하고 마당발이다.

경영활동의 공과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임명
이진복은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으로 임명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2022년 5월1일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이 서울시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실 인선 결과를 발표하며 정무수석에 이진복이 내정됐다고 밝혔다.

장제원 실장은 "이진복 전 의원은 국회 보좌진으로 정계에 입문하고 구청장과 3선 의원을 역임한 관록의 정치인"이라며 "부드러운 성품과 성실함, 신의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정치력을 다져왔다"고 소개했다.

이후 5월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식으로 정무수석에 임명됐다.

이진복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첫 여야 영수회담 일정을 조율했는데 무산됐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과 민주당 사이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뉴시스는 5월15일 이진복이 영수회담 조율을 위해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통화를 시도하고 문자를 남겼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이수진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진복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허위사실로 언론플레이한다"고 반박했다.

이진복은 5월23일 윤석열 대통령을 대신해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3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지역일정을 소화하는 게 무리라는 판단 때문으로 알려졌다.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이진복 정무수석(오른쪽)과 안상훈 사회수석이 2022년 5월1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의원 시절
이진복은 부산 동래구에서 3선 의원을 지냈다.

동래구청장 재선에 실패한 뒤 일본 동지사대학교 대학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중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도와달라고 해 귀국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한 뒤 김무성 의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박 무소속 연합'에 참가해 부산광역시 동래구 후보로 출마했다. 득표율 51.15%로 오세경 한나라당 후보(37.40%)를 꺾고 당선된 후 같은 해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동래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득표율 53.42%)했으며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3선 고지(득표율 42.52%)를 밟았다.

18대 국회 때 초선의원으로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험회사가 실손의료보험 중복 가입자들에게 보험료를 환불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

실손의료보험은 중복 가입자가 보험금을 이중으로 받을 수 없다. 보험회사가 이러한 사실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많은 소비자들이 보험료를 중복으로 부담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로잡았다. 또한 소상공인 카드수수료 인하도 추진했다.

제19대 국회 후반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를 지내며 소상공인 및 재래시장 보호를 위한 입법 활동에 힘썼다. 야당 간사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활법) 통과에도 기여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같은 지역구에 나와 42.52%의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다.

20대 국회에선 전반기 정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정무위원장 시절 정무위 국정감사 피감기관 등으로부터 '칼진복'으로 불리기도 했다. 회의 진행을 원활히 하고 여·야의 의견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정해서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면서 2016년 12월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합류했다. 이후 2017년 5월 비유승민계 의원들과 함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엔 상임특보단장에 임명됐다.

2020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진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역임했다.

2021년 재보궐선거 때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선언했지만 국민의힘 경선에서 탈락했다.

△동래구청장 시절
이진복은 부산 동래구청장을 역임했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동래구청장 출마를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진복은 한나라당 당내 경선을 거쳐 후보 자격을 얻은 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장 선거에 출마해 득표율 61.45%로 당선됐다.

동래구청장 시절 '운동화 구청장'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현장을 중시했다.

출근 전 1시간, 근무 중 1시간, 퇴근 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1시간씩 매일 하루에 3시간 정도 지역을 돌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자전거를 타고 지역을 돌아다녔다.

구청장 재직 중 도시가스관을 하수구에 묻는 공사현장을 목격해 시정하고 독거노인과 형편이 어려운 주민이 구청으로부터 받은 쌀을 주위에 반값으로 판다는 사실을 알고 쌀 대신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맞춤형 복지를 실시했다.

동래 온천천을 자연 친화형 도심하천으로 되살렸다. 온천천 복원사업은 서울 청계천 복원사업의 모델이 됐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동래구 구청장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정치 입문
이진복은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78년 10대 총선 때 부산 동래구에 출마한 이기택 신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자발적으로 하다가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1981년 11때 총선 때 박 전 의장이 세 차례나 집으로 찾아와 도와달라고 요청해 박 전 의장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 뒤로 이진복은 2001년까지 박 전 의장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박 전 의장이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치특보를 맡을 때 박 전 의장을 따라가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과 정치특보실 국장을 지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 앞줄 왼쪽부터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22년 5월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엄수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노 전 대통령 묘역에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복은 윤석열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을 맡아 정치권과 소통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어 국정과제 추진 과정에서 야당을 잘 설득해내는 것이 이진복의 역할이다.

2024년까지 여소야대 상황이 이어지는 데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초반 지지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만큼 국회와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여당과 보조를 맞추는 일도 필요하다. 국민의힘과 정부 사이에 불거질 수 있는 당정 갈등을 조율하는 것도 이진복의 몫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목소리가 다르면 언론에서 '당정 갈등'을 이슈화할 수 있다.

2022년 6월 지방선거 이후 대통령실과 지자체 사이 소통을 강화하는 데도 힘써야 한다.

◆ 평가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 2017년 2월12일 이진복 바른정당 의원(오른쪽)과 김무성 의원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바른정당 의원 및 원외위원장 대토론회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였다가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웠는데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국비로 독일에 유학할 수 있다며 부산기계공고 진학을 강력히 권유해 공고를 택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으로 한국 정부와 관계가 나빠진 독일이 더 이상 한국 유학생을 지원하지 않아 독일 유학 기회 자체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린 나이에 사회가 자신한테 약속한 일을 어겼다는 배신감이 느껴졌다고 한다.

유신시절인 1973년 9대 총선 때 투표장에 두 번 들어가는 동네 아주머니를 보고 참지 못해 투표함 위에 걸터앉아 이의를 제기하며 투표행위를 중단시킨 바 있다.

부산기계공고 졸업 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다가 제10대 총선을 맞아 자발적으로 이기택 신민당 후보를 도우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부산 동래구청장을 거쳐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내리 3선한 만큼 직업 정치인 경력이 풍부하다.

박 전 의장이 구청장 출마를 권유했을 때 이진복은 준비가 안 됐고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용기를 북돋아준 게 출마를 결심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을 정치 스승으로 여긴다. 이진복은 언론 인터뷰에서 "항상 겸손하고 합리적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의장의 장점을 닮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서관 시절 박 전 의장이 왜 그렇게 책을 안 읽느냐고 지적해 책을 많이 읽게 됐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비서관 출신인 김무성 전 의원과도 친분이 깊다. 부산을 지역구로 두면서 김 전 의원이 중심이 된 친박 무소속 연대에 함께했고 이후 바른정당에도 동행했다.

성격이 원만하고 대인관계가 폭넓은 편이다. 친박계 의원으로 꼽히면서도 비박계·친이계 정치인들과 교류가 많아 당내에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19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간사, 20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으며 민주당 의원들과도 교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무수석은 주로 여야 원내대표와 교섭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원직 경험을 비롯해 중량감 있는 인사가 맡곤 한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헤아리는 복심이 가는 자리라는 인식도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첫 정무수석인 이진복은 윤석열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권 최측근으로 꼽히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장제원 의원 등이 모두 바른정당 출신들로 이진복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진복을 정무수석으로 기용한 것은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한 인선으로도 풀이된다.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면서 배움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에 입학해 행정학 학사학위를 딴 데 이어 동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2001년 지방자치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논문으로 '한국의 정치발전과 정치자금 제도의 연구'를 냈다.

사건사고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이진복 정무수석이 2022년 5월1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 엘시티 개발비리 개입 의혹
이진복은 부산 엘시티 개발비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검찰은 2016년 12월 초 이영복 엘시티 회장 비리사건 수사 과정에서 이진복이 이영복 회장의 청탁을 받고 엘시티 사업의 특혜성 인허가에 개입하고 뒷돈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진복과 가족의 계좌를 압수수색했다. 현역 정치인이 엘시티 비리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이진복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뚜렷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2017년 3월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서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엘시티 개발사업은 부산광역시가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백사장 바로 앞 6만5934㎡에 '해운대관광리조트'라는 이름의 초고층 사계절 휴양시설을 짓기로 하면서 2007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업을 맡은 민간 컨소시엄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용도변경 등을 요구하고 부산시가 이를 수용하자 정·관계 로비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엘시티 비리의혹과 관련해 검찰은 이영복 회장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 24명을 기소했다.

△선거캠프 사무장에게서 금품 받아
이진복은 2012년 19대 총선 과정에서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진복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선거캠프 사무장에게서 2천만 원을 받아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부산지방검찰청은 2015년 6월22일 정치자금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증거와 상황을 종합 검토한 뒤 불법 정치자금이 아니라 단순 차용금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선거자금으로 사용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고, 이 의원이 2년 후 자발적으로 변제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 의원이 시의원 후보자로부터 공천을 부탁받으면서 1500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돈을 받은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 2020년 3월20일 이진복(오른쪽)이 국회에서 열린 미래통합당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황교안 대표로부터 총괄선거대책본부장 임명장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1년부터 2001년까지 박관용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1993년 대통령 민정비서실 행정관을 지냈다.

1994년 대통령 정치특보실 국장에 임명됐다.

2002년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장에 당선됐다.

2008년 부산 동래구에서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 때 재선에 성공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국회 후반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았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자유한국당 상임특보단장을 맡았다.

2022년 5월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 학력

연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동해중학교를 나왔다.

1977년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마쳤다.

1999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배우자 김진희와 1남2녀를 두고 있다.

◆ 상훈

◆ 기타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2020년 8월28일 공개한 퇴직의원 재산등록에 따르면 5월29일 기준으로 이진복은 자신과 가족이 모두 14억6761만 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육군 이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2008년 '꿈을 꿀수록 희망은 커진다'(다인출판사), 2011년 '민생에 미치다'(다인커뮤니케이션즈), 2021년 '부산사람 부산사랑 이진복, 부산과의 대화'를 출간했다.

어록
[Who Is ?] 이진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 2021년 1월28일 이진복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부산시장 보궐선거 예비후보 비전 발표회에서 자신의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 때는 캠프에 들어가면 괜히 권력이나 탐하고 온 사람인 것처럼 비칠까봐 전직 의원 모임에 참여하는 등 뒤에서만 도왔다. 2~3주 전쯤 정무수석에 지명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당선인을 처음 찾아뵀다. 정당간 다툼이야 어쩔 수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노력을 하는 게 내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2022/05/04,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부산을 싹 다 바꾸겠다. CHANGE, ALL NEW BUSAN." (2020/11/23,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우리는 잃을 게 없다. 하지만 저쪽은 터질 게 있다. 우리가 희망적이라고 보는 이유 중 하나다. 저쪽에서는 그것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거다.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올 것'이라는 표현만 쓰겠다." (2020/04/02,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총선 결과를 가를 마지막 변수를 묻는 질문에)

"당이 대통합을 통해 100%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 국민의 뜻에 부합했다고 보기에 지체 없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한다. 그동안 탄핵으로 분당이 되고 정권을 빼앗겼을 때 국민 여러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책임지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그냥 떠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저는 이번 총선에 출마하지 않지만 일부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만든 잘못된 선거법에 항거하고 보수의 승리와 총선 승리, 정권 재창출의 굳건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미래한국당으로 옮겨 개혁의 밑거름으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2020/02/19,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대기업들이 일방적으로 자기들만 살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고 중소·중견기업들과 같이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대기업도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을 하고 우리나라의 위상, 국익도 고려해 넓은 시장에 가서 싸워야 하기에 우리 또한 대기업이 성장하게 도울 수 있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기꺼이 도와줘야 한다. 지난 정권들이 대기업을 비호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면 그것은 앞으로 고쳐져야 한다. 어떤 정권이든 간에 사회적 약자, 힘없는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2017/07/26, 브레이크뉴스 인터뷰에서)

"(명문대를 가지 못해)열등의식이 늘 상존했다. 국회의원 비서 할 때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다. 학교에도 차이가 있듯이 지식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심하더라."

"나처럼 명문대학교 출신이 아니고 위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이 정치를 하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이다. 정치는 의욕만으로 되지 않는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지,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오르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2017/06/09,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국회의원은 연습할 시간이 없다. 동래를 잘 알지 못하고 동래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국회의원을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2016/04/06, 4·13 총선을 앞두고 프레시안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