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벼랑끝 전술’을 펼치다가 미국의 역공에 몸을 낮췄다.

김 부장은 수십 년 동안 미국과 협상 전면에 선 북한 외무성의 ‘백전노장’으로 북핵 역사의 고비마다 기싸움에서 승기를 잡았는데 이번에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Who] ‘벼랑끝 전술’ 펼쳐온 북한 김계관, 트럼프 역공에 몸 낮춰

▲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김 부상은 25일 담화를 통해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시기에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 상봉이라는 중대사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점을 내심 높이 평가해왔고 ‘트럼프 (비핵화) 방식’이 쌍방의 우려를 다 같이 해소하는 등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부상의 담화문은 과거와 달리 겸손하고 온건한 태도를 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의 차질 없는 진행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다. 

이로써 북미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펼쳐온 벼랑끝 전술에도 제동이 걸렸다.

김 부상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등은 최근 담화문을 내고 미국 측이 내놓은 비핵화 해법에 거칠게 대응했다.

김 부상은 16일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다가오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 부상도 21일 마이클 펜스 미국 부대통령을 “얼뜨기”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김계관’이라는 이름은 미국에게 악명 높다. 볼턴 보좌관은 16일 김 부상을 두고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항상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 부상은 북한이 초강경 입장을 고수해온 북미 비핵화 협상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92년 2월 뉴욕에서 북미 고위급 회담을 수행했고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관련 논의에서도 등장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시절 2004~2008년 북핵 6자회담의 수석대표를 지내며 강석주 당시 외무성 제1부상과 함께 북핵 협상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김 부상은 2003년 6자회담에서 볼턴 보좌관이 미국측 수석대표를 맡는다고 하자 “볼턴 보좌관이 나오면 상종하지 않겠다”고 버텨 이를 막기도 했다. 볼턴 보좌관은 이에 앞서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적 독재자’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딕 체니 전 부통령도 김 부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는 2011년 회고록 '나의 시대'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어긋나기 시작한 단초는 2006년 6자회담의 미국 대표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대표 김계관의 단독 회담”이라고 밝혔다.

김 부상은 2008년 “우리와 협상을 그만두고 싶으냐”고 미국을 압박했고 2009년 핵실험을 강행했다. 6자회담이 장기 공전상태에 들어가자 미국 정계에서는 ‘김계관이 힐을 갖고 놀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 무산을 놓고 김 부상이 북한 외교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제가 된 일련의 성명들 가운데 첫 단추가 김 부상 명의였던 점과 대미 초강경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원만한 수습을 위해 북한이 이런 조치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 부상은 1943년 1월6일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어대학과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했다. 정일룡 전 북한 산업성 부수상의 사위다. 1969년 주 알제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1975년 외교부로 옮겼고 1993년부터 대미 외교 업무를 맡았다. 

1998년 외무성 부상에, 2010년 제1부상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 75세의 나이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즈니스포스트 임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