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어로 한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조선 정조의 말을 모은 책 ‘정조이산어록’에 실린 말이다. 누구에게든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뜻인 동시에 정치인은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경계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나경원의 막말, 순간의 쾌감이 남기는 긴 정치혐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1일 대구 두류공원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권은 연이은 막말 논란에 휩싸여 있다. 

13일 현재 가장 크게 불거진 막말 논란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1일 대구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꺼낸 ‘달창’ 발언이다.

달창은 문 대통령의 지지자 모임인 ‘달빛기사단’을 속되게 이르는 인터넷 은어다. ‘일간베스트(일베)’ 등의 극우 웹사이트에서 만들어낸 여성 비하 용어이기도 하다.

정치인이 공개석상에서 절대 꺼낼 수 없는 수위다. 나 원내대표가 제1야당의 여성 원내대표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부적절한 말로 여겨질 수 있다.

한국당은 이전에도 소속 의원들의 ‘5.18 망언’과 세월호 관련 막말로 도마에 올랐다. 김무성 한국당 의원도 ‘청와대 다이너마이트 폭파’ 발언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도 막말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성명에서 나 원내대표를 친일파에 빗댄 ‘토착왜구’로 일컬었다. 민주당 인사들도 한국당을 ‘도둑놈’이나 ‘한줌거리’로 지칭해 반발을 샀다.

이런 정치권의 막말 논란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대통령을 향한 막말 공방은 이전에도 종종 일어났다.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2004년 연극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노가리’ 등으로 불러 파문이 일었다. 민주당에서도 2013년 당시 홍익표 수석대변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에 빗댔다가 사퇴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권 막말은 질이 더욱 나쁘다. 대통령뿐 아니라 상대 정당과 지지층, 사회적 사건의 피해자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있다.

정치인이 막말에 책임지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당장 나 원내대표도 11일 달창의 뜻을 몰랐다는 사과문을 기자들에게 문자로 보낸 뒤에는 관련 사안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여야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말은 지지층을 모을 수단으로 꼽힌다. 상대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지지층에게는 후련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당은 2019년 들어 막말 논란에 잇달아 시달렸지만 정당 지지율은 여러 여론조사를 통틀어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미국 대선 당시 ‘막말 퍼레이드’ 비판을 받으면서도 지지층 결집에 성공해 당선된 전례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야말로 현재 정치권이 ‘한때의 쾌감’만 쫓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막말을 하면 당장 지지율과 인기는 오를 수 있다. 그러나 핵심 지지층 외의 다른 국민들에게는 지지를 얻기 힘들어진다. 장기적으로는 정치 혐오가 심화돼 전체 정치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연초 토론회에서 “정치권의 막말과 자극적 발언이 쏟아지면서 정치 혐오를 키우고 있다”며 “품격 있는 국회가 돼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자성하기도 했다.

국회는 몇 개월째 공전 상태에 놓여있다. 2020년 총선도 1년여밖에 남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앞으로도 정치권의 막말 논란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치인이 이런 상황에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정치인의 말은 스스로의 품격을 대변한다. 나아가 정당과 정치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대가 수준 낮게 굴어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 나라의 모든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말을 우리 정치인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