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과달루페 강 일대에서 발생한 돌발홍수로 침수된 주택이 방치돼 있다. 이번 홍수로 수십명의 10대 소녀를 비롯해 100명 이상이 숨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후대응 정책을 축소하면서 최악의 홍수 피해가 났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한반도는 1980년대까지 냉전의 공기가 두텁게 내려누르고 있었다.
당시 말글살이도 살벌했다. 간첩단, 남파간첩, 난수표, 독침, 요인암살. 신문에는 이런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
여기에는 ‘세뇌’라는 낱말도 간혹 등장했다. 북괴의 간첩에 세뇌되어 반체제 활동에 나섰다, 뭐 그런 식이었다.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던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음, 그렇군.
나중에 외국 서적을 읽으며 ‘brainwashing’이라는 단어를 만나고서야, 혹시 세뇌(洗腦)가 영어 단어를 번역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씻을 세’(洗)를 쓰는 것도 같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이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세뇌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기계처럼 조종할 수 있다는 세계관에 터잡고 있다. 어떤 사람의 신념과 사고를, 다른 누군가가 주입해 조종한다는 발상이 해괴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최근 ‘브레인워싱’을 뒤로 하고 ‘그린워싱’(greenwashing)을 만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재난이 본격화하면서 각국의 기업들은 소비자와 규제 당국의 압력에 직면했다. 기업들은 무엇이든 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윤과 효율을 지상 목표로 삼았던 기업에게 ‘차카게 살자’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이에 일각에서 그린워싱이 유행했다. 기후대응에 적극 나서는 것처럼 위장해 소비자와 주주 등을 속이는 것이다. ‘녹색 분칠’이라 해야 하나.
그린워싱은 ‘그린’과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눈가림)의 합성어라고 한다. 참고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원작에는 백인이 아닌 캐릭터인데 백인 배우가 그 역할을 맡는 것도 화이트워싱이라 부른다.
기업들의 이런 움직임에 시민단체와 언론, 규제당국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를테면 영국 가디언은 올해 5월18일 “유럽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목표로 조성된 ‘녹색 펀드’ 다수가 화석연료 기업에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화석연료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꼽힌다. 녹색 펀드의 그린워싱을 직격한 것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6월 포스코의 탄소중립 철강 브랜드 ‘그리닛’을 두고 “실제 탄소 저감 효과는 미미한데 기후대응이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며 시정하도록 행정지도 조처를 내렸다.
그런데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으로 다시 새로운 풍경이 열리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기후변화 대응 문제와 관련해 언급을 피하는 ‘그린허싱(greenhushing)’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hush) 하는 것이다.
애초 그린허싱은 기업들이 말꼬리를 잡힐까 싶어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그런데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기후대응 행동을 내부적으로 추진하면서 외부로 노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또 다른 그린허싱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정치권 압박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기업의 기후대응 정책을 정치적으로 불온하게 바라본다. 민주당의 음모라는 시선이 강하다. 실제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정치권의 압박에 연이어 기후정책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했다.
유럽에 본사를 둔 기업들도 최근 자국민들의 우경화 영향에 자사의 기후대응 활동 홍보를 최대한 줄이고 있다고 한다.
제니퍼 홈그렌 생명공학 기업 ‘란자테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지금은 기후대응 주장을 펼쳤다가는 일각에서 본능적인 반발이 나오게 되기에 불필요한 관심을 모을 때가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업들이 그린허싱까지 하면서 기후대응에 나서는 것은 결코 ‘착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기업들은 기업 생존과 이윤 확보를 위해 기후대응을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모건스탠리가 올해 4월 발표한 ‘2025년 지속가능투자연구소, 기업들의 지속가능 신호’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글로벌 기업 336곳 가운데 약 57%가 기후변화로 사업에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폭염과 폭풍우, 가뭄 등이 기업 활동에 직접적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기업은 기후대응에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관계자는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전환에 무척 적극적이라 때로 시민단체 사람들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며 “글로벌 스탠다드를 맞춰야 수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해 이미 상당한 투자를 진행했기에 투자한 자본이 아까워서라도 적극적 전환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기후변화로 사람들이, 기업들이 바뀌고 있다. 다소 늦었지만 긍정적 변화이다. 안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