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디모데 기자
2018-09-06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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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 생애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당내 최다선인 7선 의원이자 최대 계파인 친노의 좌장으로서 경륜을 살려 강한 여당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1952년 7월10일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자퇴한 뒤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유신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동안 복역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2년6개월 형을 살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서울 관악구에서 당선돼 내리 5선을 지냈다. 세종시에서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김영삼정부 때 조순 서울시장의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김대중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노무현정부 때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해 실세 총리로 불렸다.

    대선에 출마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탈락해 뜻을 접었다. 그뒤 민주통합당 대표를 지냈으나 대선에서 야권 단일화를 두고 정치쇄신을 요구하는 당 안팎 목소리가 커지자 지도부와 함께 사퇴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진표 송영길 의원을 꺾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 활동의 공과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 정부 2년차에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임기는 총선이 열리는 2020년까지 2년이다.

    이해찬은 2018년 7월20일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는 “당의 중진으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불가피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해찬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이 출마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 우리 역사를 50년 후퇴시키는 것”이라며 “상황이 점점 엄중한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최종적으로 출마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8월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국무총리까지 해 바라는게 없고 사심이 없어 공정할 수 있다”며 “든든하고 강한 민주당을 만드는데 전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해찬은 42.88%의 지지를 받아 송영길(30.73%) 김진표(26.30%) 의원을 제치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7선의 경륜을 내세워 강한 여당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두루 지지를 얻은 것으로 풀이됐다.

    취임과 함께 협치를 앞세우며 첫 공식행보로 8월27일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8월29일에는 경북 구미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대구·경북지역 민심을 얻어 20년 집권 가능한 전국정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일환으로 파악된다.

    8월30일 고위당정청협의회 회의에서 종합부동산세 강화 의지를 드러냈고 월1회 당정청회의 정례화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9월4일에는 6년 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등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을 지지하며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8년 8월25일 당대표에 선출된 후 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대표
    19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한명숙 대표의 뒤를 이어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를 지내며 18대 대선을 치르는데 발판을 놓았다.

    2012년 6월9일 민주당 임시 전국대의원대회에서 24.3%를 득표해 23.8%를 얻은 김한길 후보를 박빙의 차이로 꺾고 대표에 올랐다. 대의원 투표는 김한길 후보가 앞섰으나 모바일과 현장투표를 합산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해찬이 앞질렀다.

    이해찬은 “민주당을 안정된 수권 정당으로 만들고 일자리와 민생 정책으로 국민에게 희망이 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며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를 들고 대선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며 모든 대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핵심공약으로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종북주의라며 공격하는 박근혜 새누리당의 매카시즘에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며 신매카시즘 논란을 점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찬은 대선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가 정치 쇄신을 요구하며 후보 단일화의 명분을 요구하자 최고위원 전원과 함께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해찬은 “오직 정권 교체와 단일화를 위한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며 “더 이상 문재인 후보의 고뇌를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책임총리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며 소신 있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였다.

    이해찬은 16대 대선 때 노무현캠프 선거기획단장,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준비단장을 지내는 등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돌아와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 총리가 물러나자 국무총리에 발탁됐다. 노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이해찬에게 힘을 실어줬다.

    국무회의를 이해찬이 주재하고 노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만 참여했다. 이해찬은 인사 등에도 상당 부분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공개적 자리에서 “대통령 측근이나 사조직이 발휘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하며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유념하도록 당부하기도 하는 등 다른 총리들보다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대통령과 의견이 다를 때는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하기도 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입각을 놓고 의견을 달리하며 물러서지 않아 노 대통령이 “그러려면 총리를 그만 두라”고 했을 정도다. 

    ▲ 이해찬 국무총리가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이해찬 세대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교육 개혁정책을 펼쳤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이해찬 교육정책의 영향을 받은 세대를 '이해찬 세대'로 부른다. 20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02학번으로 입학한 1983년생이 이해찬 1세대, 2003년 졸업 후 03학번으로 입학한 1984년생이 이해찬 2세대다.

    이해찬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1998년 2월 제38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전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수시 전형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야간 자율학습, 월말고사, 학력교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했다. 내신 평가에 수행평가를 의무화한 것도 이 때다.

    상대적으로 면학 강도가 낮아지면서 이해찬 세대를 '단군 이래 최저 학력'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해찬 1세대가 치른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역대 최고로 어려웠던 1997학년도 수능에 버금갈 정도로 어려운 불수능으로 출제되면서 단 한 명의 만점자도 나오지 않아 이런 인식이 더욱 깊게 뿌리박혔다. 2002학년도 수능은 전년 대비 문과는 평균 98.2점, 이과는 91.3점이 하락했다.

    이해찬은 나중에 그의 교육정책이 학력저하를 낳았다는 논란과 관련해 인터뷰 등을 통해 '옳은 방향이었다'며 수능 대신 면접 등을 다양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는데 언론이 한 과목만 잘하면 대학에 간다고 잘못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학력 저하는 없었으며 '공부 못 했던 일부의 넋두리'라는 말도 했다.

    이 외에 학생 인권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체벌과 구타를 하지 못하도록 지침이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원산폭격 등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던 체벌과 구타가 크게 줄어들었다.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하고 교원 성과급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조치는 교원 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1999년 5월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 이해찬 민주당 의원이 1992년 14대 대선 때 노무현 의원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지원유세를 기다리고 있다.

    △세종시 애정 
    이해찬은 세종시 입안자로서 현재는 세종시 지역구 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은 “공직은퇴 후 세종시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등 세종시에 애착을 보였다.

    이해찬은 대선 때부터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기획하고 추진한 당사자다. 총리가 된 뒤에도 가장 중요한 국정 현안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꼽았고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록 수도 이전은 위헌 판결을 받았으나 중앙행정기관 등을 이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 신도시인 행복도시가 탄생하게 됐다. 행복도시는 이해찬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착공했고 2012년에는 지방자치단체로서 세종특별자치시가 설립됐다.

    이해찬은 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복귀할 때 세종시를 지역구로 선택했고 무난히 당선돼 20대 재선까지 성공했다.

    이해찬은 20대 국회에서 세종시 의원 숫자를 늘리고 자치조직권을 강화하는 세종시 특별법 개정안과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행복도시 특별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된 뒤에도 세종시 국회 분원(세종의사당) 설치를 주장하는 등 과거 세종시 구상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7선의 선거 이력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후보로만 출마해 7선을 했으며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민주당계 정당이 자주 이름을 바꾸면서 7선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이름의 정당으로 출마한 적이 없으며 무소속 출마가 한 번 있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31.18%로 당선됐다. 재선 의원이던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와 4선 의원이었던 김수한 통일민주당 후보를 꺾었다. 당시 35세로 13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14대 때도 역시 같은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4.69%의 득표율로 김수한 민주자유당 후보를 꺾었다. 15대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44.75%로 박홍석 신한국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16대 총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47.48%의 득표율로 권태엽 한나라당 후보를 제쳤다. 17대 때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해 41.11%를 득표해 김철수 한나라당 후보와 유종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꺾고 5선에 성공했다.

    18대 총선은 출마하지 않았으며 19대 총선에서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자유선진당 대표인 심대평 후보와 신진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47.8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개인 역대 최고 득표율을 보였다.

    20대 총선 때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정무적 판단을 내세우며 이해찬을 공천하지 않자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했다. 박종준 새누리당 후보와 문흥수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꺾고 43.72%를 득표하며 무난하게 당선됐다.

    당선된 후 9월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해 당내 최다선 의원이 됐다.

    ◆ 비전과 과제

    ▲ 이해찬 민주평화당 후보가 1988년 김대중 평화민주당 의원과 함께 13대 총선 관악구 지지유세를 하고 있다.

    당대표 경선을 치르면서 발생한 당내 잡음을 추스리고 ‘원 팀’을 갖추는 일이 최우선이다. 이해찬은 민주당 워크숍에서 “원 팀 정신으로 당을 잘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9월3일에는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한 송영길 의원과 오찬을 함께 하며 당 운영을 논의했다.

    문재인 정부 2년차에 들어 떨어지고 있는 국정 운영 지지도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을 끌어 올려야 한다. 이해찬은 정부가 원활한 국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민주당이 공동운명체로서 일하겠다는 뜻을 내놓고 있다.

    이해찬이 실질적으로 겨누고 있는 목표는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 승리다. 이해찬은 9월1일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다음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둬서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닦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발 나아가 이해찬은 민주당의 장기집권 구상도 마련하고 있다.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완수하려면 4번 정도 연속집권이 필요하다며 20년 집권론을 펼친다. 그는 8월27일 취임 후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 정부 20년 집권 계획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년 집권론을 놓고 야당은 “독선적 발언”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수권정당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도 야당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은 이승만 박정희 묘역에 참배하고 경북 구미시청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여는 등 과거 보수진영에 정면으로 맞서던 강성 이미지를 내려놓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평가

    ▲ 김대중 새정치민주연합 총재와 이해찬 정책위 의장.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14대 손이다.

    10월 유신으로 휴교령이 내려 고향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자 다시 상경해 학생운동 모임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름에서 기인한 '해찬들'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부엉이를 닮은 외모로 '대장 부엉이'라는 별명도 있다. 쌀쌀맞은 성격 탓에 지지자들 사이에서 '쿨한 부엉이', 약칭으로 '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낸 많지 않은 정치인 가운데 하나로 친노에서 친문으로 이어지는 계파의 좌장격으로 여겨진다.

    이해찬은 1987년 6월 항쟁 때 민통련 활동을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알게 됐고 1988년 13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으로 함께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초선인 이상수 의원까지 세 사람은 서로 정당은 달랐으나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위 3총사’로 주목을 받았다. 

    1997년 노무현 의원이 몸담고 있던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국민회의로 끌어들일 때 이해찬이 협상 대표로 나서 노 의원과 교섭했다. 1998년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이 됐을 때 노 의원은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이해찬을 지원했고 2000년 노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이 될 때 이해찬의 물밑 추천이 작용하기도 했다.

    이해찬은 2002년 노무현 선거대책본부의 기획본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측근으로 활동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 뒤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으로 이해찬의 발탁을 검토했고 결국 고건 총리의 후임으로 이해찬을 임명했다.

    취미는 바둑과 독서로 특히 책을 좋아하고 초기 경력에서 책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1978년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했다. 광장서적은 이해찬의 정계 입문 뒤 그의 동생이 운영했으나 2012년 12월31일 부도를 내고 폐업했다.

    출판사인 범우사, 평민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한마당’, ‘평민서당’ 등을 설립했다가 불온서적 출판을 이유로 등록이 취소됐다. 이후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해 사회과학 서적을 냈다. 출판사 이름은 장준하 선생의 저서 돌베개에서 따왔다.

    이런 성향이 이어져 교육부 장관 시절 국가 차원에서 학교도서관활성화 종합방안 등 독서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사업으로 2002년 학교도서관 설치율이 80.4%에서 2008년 95.1%까지 늘어나고 1인당 장서 수는 같은 기간 5.5권에서 12권으로 증가했다.

    7선 의원, 국무총리, 당대표 등을 지내면서 많은 인맥을 구축했고 이들은 문재인 정부 요직에도 포진해 있다.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비서실장이었고 정태호 일자리수석은 13대 의원 시절 보좌관이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총리 시절 시민사회비서관이었고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민주통합당 대표 비서실장 출신으로 원내 지도부와도 각별한 사이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융통성이 없고 깐깐하다, 야박하고 인정이 없다는 식의 평가도 받는다. 2004년 박창식 기자가 펴낸 평전 ‘쿨하게 출세하기’에서는 이해찬이 인간성 좋은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다며 날카로운 외모처럼 면도날 같은 성격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1997년 이해찬이 탄 차가 다급한 일정으로 이동 중 불법 유턴을 하다 교통순경에게 적발된 일이 언급된다. 교통순경이 시간을 끌며 범칙금 흥정을 하려 하자 이해찬은 의원 신분증을 보여줬고 놀란 교통순경은 그냥 가라고 했다. 이에 이해찬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안되겠다 차에 타라”며 마포경찰서로 교통순경을 데려가 인계했고 순경은 조사 뒤 10일간 영창을 갔다고 한다.

    1988년 지역구인 신림동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른 건설사의 중역이 찾아와 현금 보따리를 건네려 하자 “콩밥을 먹이겠다, 끌어내라”고 호통을 친 일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 총리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함께 일했던 유시민 전 장관과 친밀한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 시절 총학생회와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는데 당시 총학 간부였던 유시민 전 장관과 멱살잡이를 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한 뒤 운동권 선후배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해찬이 여의도에 입성한 뒤 유 전 장관을 보좌관으로 영입해 정계 발판을 놓아줬다. 유 전 장관이 독일 유학 시절 생활고에 처하자 이해찬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전문위원 자리를 연결해 주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은 이해찬을 인생의 스승으로 꼽으며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생각이 바르고 간사함이 없다는 의미로 사무사(思無邪)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이해찬은 유 전 장관을 놓고 “유시민 본인이 정치 안하고 지식인 활동을 하겠다는데 조금 더 나라를 위해 퍼블릭 섹터에서 일을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해찬은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시민 전 장관을 내정하자 이에 반대하며 고성이 오갔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려면 총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찬은 유 전 장관 입각에 여당 의원이 반발하고 있어 당장이 아닌 차기나 차차기 장관으로 미루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3선 의원 시절 이훈평 전 의원의 권유로 뒤늦게 골프에 입문했는데 많을 때는 한 주에 3~4번 씩 골프를 칠 정도로 골프에 푹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 시절 국무위원이나 경제단체장들과 골프를 치며 현안을 논의하는 골프회동을 자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도 산불, 남부지방 호우, 3·1절 기념식 등의 일이 있을 때도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이 알려지면서 총리직 수행에 발목을 잡기도 했다.

    종교는 무교다.

    ◆ 사건/사고

    ▲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2012년 6월9일 제2대 민주통합당 대표에 선출됐다.

    △보수언론과 반목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이른바 보수언론과 관계가 좋지 않다. 2004년 총리 시절 거침없는 발언이 보수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지자 독일 베를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나라를 흔들던 밤의 대통령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용서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역죄는 용서못한다”며 “조선과 동아가 나라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 안기부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역사 발전에는 기여한 일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강하게 반발했다. 조선일보는 “조선 동아는 총리가 태어나기 전에 창간돼 나름대로 싸워왔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동아일보는 “개혁을 빌미로 자유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정부여당이야말로 역사에 반역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이해찬은 2004년 10월2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유신 긴급조치 때 자유 언론을 주장한 수많은 기자들을 집단해고하고 다시 복직시키지 않았다”며 “시대에 반하는 행위이자 역사의 반역”이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해찬은 2006년 3월1일 3·1절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고 골프모임에 참석해 논란이 됐는데 특히 보수언론이 공격의 선봉에 서며 집중 포화를 쏟아냈다. 결국 이해찬은 2주 만에 총리에서 물러났다.

    2012년 YTN라디오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 인터뷰 중 당초 주제인 대표 경선과 관련된 질문 대신 북한 인권법 추진과 임수경 의원의 막말 파문 등을 질문 받자 “언론이 왜 인터뷰를 이렇게 하냐”며 “취지에 맞는 질문을 해야 답변을 한다”고 격분하며 생방송 도중 전화를 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해찬은 트위터를 통해 “청취자들에게 죄송스럽다”며 “보수언론이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는데 진행자가 당초 약속을 파기하고 취지에 벗어난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고 해명했다.

    이해찬은 보수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로 나왔을 때 “수구언론과 새누리당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2018년 8월25일 전당대회 정견 발표문에서도 “저 이해찬은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
    2004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대부도 땅 취득과 관련해 투기 의혹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이해찬의 배우자가 2002년 경기도 안산 토지를 취득했는데 영농경력이 없음에도 농지 취득 자격증명 신청서에 15년의 경력이 있다고 기입했다. 또 김씨가 토지를 구입할 때 배우자가 공업사 대표라고 신분을 속였으며 우리은행에서 1억2천억 원을 대출받고도 재산신고 내역에 누락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의 토지는 대부도 개발계획에 따른 개발지역에 속해 있고 거래 당시 3.3㎡당 25만 원에서 35만 원으로 가격이 올라 투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해찬은 “장인이 돌아가면서 상속금을 주시면서 주말에 농사라도 지을 수 있는 땅을 하나 사라 하셨다”며 구입 경위를 해명했다. 또 포도 농사와 밭작물을 심는 등 영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팔 생각은 전혀 없다고도 말했다.

    이해찬의 해명에 부동산 투기 논란은 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임명동의안은 2004년 7월29일 본회의에서 재적 289명 중 찬성 200명으로 통과됐다.

    ◆ 경력

    ▲ 중학교 시절 이해찬.

    1978년 광장서적 대표를 지냈다.

    1979년 돌베개출판사 대표를 지냈다.

    1980년 서울대학교 복학생협의회 대표,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정책실 차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과 부대변인,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일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역임했다.

    1988년 민주평화통일연구회 상임이사와 연구소장을 지냈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13~17대 국회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1991년 신민주연합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1992년 민주당 당무기획실장을 거쳤다.

    1995년 제31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제38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단장을 맡았고 2004년 열린우리당 외부인사영입추진위원장과 국회개혁추진단장 등을 지냈다.

    2004년 제36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2009년 시민주권 상임대표를 맡았다.

    2011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2012년 세종시를 지역구로 민주통합당 소속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2년 6월부터 11월까지 민주통합당 당대표를 지냈다.

    2014년 제4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 무소속으로 20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19대 대선 문재인 후보 선대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 베이징을 다녀왔다.

    2018년 8월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 학력

    1965년 2월 충남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2월 서울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2월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8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친은 이인용씨, 모친은 박양순씨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 이씨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는데 해방 후 32세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다.

    대학 시절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다니던 김정옥씨를 만나 1978년 결혼했다. 김씨와 사이에 딸 이현주씨를 두고 있다.

    ◆ 상훈

    1996년 6월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3년 2월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기타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1989),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등의 책을 썼다.

    ‘사회학적 상상력’(2004), ‘세계환경정치’(1994), ‘돔 헬더 까마라’ 등의 책을 번역했다.

    2018년 배우자 명의의 서울 관악구 아파트와 세종시 주택 등 6억 원대 부동산을 포함해 모두 8억2665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수형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 어록

    ▲ 이해찬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1995년 조순 서울시장과 함께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풍요를 넘어 국민 개개인이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주권자로서 자랑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유능한 정치, 내 노력과 필요에 비례해 공정하게 분배받고 대우받는 경제, 삶의 전 주기에서 편안하고 안심하며 살 수 있도록 보호받는 사회, 자율과 참여 속에 내 삶이 풍요로운 지역 공동체, 평화와 협력 속에 함께 발전하는 한반도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의 약속이다.” (2018/09/04,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문재인 정부는 민주당 정부다라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공동운명체로서 함께 하겠다. 당을 잘 이끌어서 문재인 정부가 원활하게 국정을 운영하도록 하고 다음 총선에서 아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서 무조건 정권을 재창출하는 기반을 닦는 일이 당이 할 일이다.” (2018/09/01, 당정청 전원회의 인사말)

    “민주정부 20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야 한다. 겸손한 자세로 일관되고 꾸준하게 준비해야 한다. 2020년 총선까지 몇 차례의 큰 파도가 우리 당을 휩쓸지 모른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철통같은 당의 단결이다. 사심 없이 당의 단결을 이끌 노련한 선장이 필요하다. 지금은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원 팀이 되어 똘똘 뭉쳐 싸울 것이다.” (2018/08/18, 민주당 대표 후보 경선 합동연설회)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을 일곱 번 했고,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는 책임총리라는 명예도 얻었다. 남은 것은 국민들과 당원동지들께서 주셨던 신뢰와 사랑에 대한 보답할 책임뿐이다. 이 시대의 포로가 돼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다. 민주당의 20년 집권플랜을 만들어 내겠다.” (2018/07/26, 민주당 대표 예비경선 연설문)
    “문재인 정부 집권 전반기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회담의 실효성과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간 경험상 집권 후반기에 정상회담을 하면 합의를 해도 실질적인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년 평창올림픽 등 다원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2017/12/07, 페이스북에 올린 글)

    “한중 관계가 아주 경색돼 있다. 경제교류, 한류, 인적교류, 관광 등 이런 부분들에 대해 많이 풀어내는 데 역점을 두려고 한다. 오는 7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1차 한중 정상회담을 할 수 있고, 한중 수교 25주년인 8월24일께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7/05/18, 중국 특사 출국에 앞서 기자들에게)

    “사랑하는 더불어민주당에서 정권교체와 세종시 완성의 밀알이 되겠다. 3월15일 당을 떠나면서 세종시민들의 뜻을 묻고 당당히 승리해 제 영혼과도 같은 더불어민주당에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당에 복귀하여 민생위기, 민주주의 위기, 한반도 평화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호를 구하기 위해 분골쇄신하겠다.” (2016/09/30, 더불어민주당 복당 성명)

    “저는 부당한 것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의에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러한 잘못된 결정은 용납할 수 없다.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 잠시 제 영혼 같은 더불어민주당을 떠나려고 한다. 이번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 세종시 완성과 정권교체를 위해 돌아오겠다.” (2016/03/15, 공천 배제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며)

    “국정원을 누가 만들었나? 옛날 중앙정보부를 누가 만들었나? 박정희가 누군가? 박정희가 누구한테 죽었나? 김재규가 누군가? 그 박씨 집안은 중앙정보부, 안기부하고 그렇게도 인연이 질기다. 이제 끊어라. 이제 국정원과 정말로 단절하고 끊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라. 그래야 당신의 정통성이 유지가 된다. 자꾸 미워하고 거짓말하면 오히려 갈수록 당선 무효까지도 주장할 수 있는 세력이 더 늘어나게 된다. 정통성을 유지하려면 이제 그 악연을 끊어라.” (2013/07/14,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대회)
    “대통령께서 퉁퉁 불은 국수를 먹게된 경제가 불쌍하다고 했는데 그건 국가원수의 언어가 아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사고 능력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사돈 남 말하듯이 유체이탈 화법으로 말하면 안된다.” (2015/02/25,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이 추구하는 경제민주화는 공정경쟁과 분배정의를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이 상생하는 경제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무너져 내린 중산층을 다시 복원하자는 것이다. 상생, 동반성장, 균형발전을 통해 따뜻한 시장경제, 품격 있는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다. 수십 년 간 이어져온 재벌과 특권중심의 경제기조를 '민생중심경제'로 대전환하자는 것이다.” (2012/09/05,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누구나 민생을 말하지만, 아무나 민생을 책임질 순 없다. 누구나 경제민주화를 말하지만, 아무나 경제민주화를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민주당이 국민 여러분과 함께 민생을 살리겠다. 경제민주화 반드시 실현하겠다. 서민과 중산층도 함께 잘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겠다.” (2012/07/17, 민주통합당 대표 라디오 연설문)

    “이런 종합편성채널은 존속하는 것 자체가 암적인 존재가 되는 거다. 다시 집권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주파수를 회수하는 방법이 있겠고, 아니면 방송통신위원회를 여론 다양성과 품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시 만드는 방법이 있겠다. 대선 공약으로 해야 한다.” (2011/01/17, 한겨레 인터뷰)

    “미국의 하버드 케네디 스쿨과 같은 '노무현 스쿨'을 만들겠다. 좋은 정치를 위한 정책대학원 성격을 띨 것이다. 앞으로 4,5년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해 나가겠다.” (2009/07/29,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사업회 기자간담회)

    “17대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해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데 책임을 다하겠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깊이 성찰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검증된 후보로서 검증된 대통령이 돼 국민의 정부가 씨를 뿌렸고, 참여정부가 잘 가꾼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계일류로 도약시키겠다.” (2007/06/19, 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일하는 총리로서 신명을 다하겠다. 모든 부처, 모든 공직자가 소신껏 일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정부 전체의 조화가 이뤄질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부패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구조적인 부패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꿔나가겠다.” (2004/06/30, 국무총리 취임사)

    “이제 교육정책은 국가주도가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 등 수요자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사교육비 절감과 입시고통 완화에 주력하겠다.” (1998/03/04, 교육부 장관에 취임한 뒤)

    “남녘땅 광주 등지에서 무수한 동포들이 비명에 사라져 갔는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당신들의 총칼에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원혼이 구만리 청청 하늘에 떠돌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한 잠을 자겠는가, 이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은 이 땅을 민주화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목숨을 다바쳐 이 땅이 민주화 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전두환 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 (1980년 비상군법회의 재판 최후진술)
  • ◆ 활동의 공과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 정부 2년차에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임기는 총선이 열리는 2020년까지 2년이다.

    이해찬은 2018년 7월20일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는 “당의 중진으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불가피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해찬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이 출마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 우리 역사를 50년 후퇴시키는 것”이라며 “상황이 점점 엄중한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최종적으로 출마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8월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국무총리까지 해 바라는게 없고 사심이 없어 공정할 수 있다”며 “든든하고 강한 민주당을 만드는데 전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해찬은 42.88%의 지지를 받아 송영길(30.73%) 김진표(26.30%) 의원을 제치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7선의 경륜을 내세워 강한 여당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두루 지지를 얻은 것으로 풀이됐다.

    취임과 함께 협치를 앞세우며 첫 공식행보로 8월27일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8월29일에는 경북 구미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대구·경북지역 민심을 얻어 20년 집권 가능한 전국정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일환으로 파악된다.

    8월30일 고위당정청협의회 회의에서 종합부동산세 강화 의지를 드러냈고 월1회 당정청회의 정례화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9월4일에는 6년 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등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을 지지하며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8년 8월25일 당대표에 선출된 후 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대표
    19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한명숙 대표의 뒤를 이어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를 지내며 18대 대선을 치르는데 발판을 놓았다.

    2012년 6월9일 민주당 임시 전국대의원대회에서 24.3%를 득표해 23.8%를 얻은 김한길 후보를 박빙의 차이로 꺾고 대표에 올랐다. 대의원 투표는 김한길 후보가 앞섰으나 모바일과 현장투표를 합산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해찬이 앞질렀다.

    이해찬은 “민주당을 안정된 수권 정당으로 만들고 일자리와 민생 정책으로 국민에게 희망이 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며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를 들고 대선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며 모든 대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핵심공약으로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종북주의라며 공격하는 박근혜 새누리당의 매카시즘에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며 신매카시즘 논란을 점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찬은 대선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가 정치 쇄신을 요구하며 후보 단일화의 명분을 요구하자 최고위원 전원과 함께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해찬은 “오직 정권 교체와 단일화를 위한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며 “더 이상 문재인 후보의 고뇌를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책임총리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며 소신 있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였다.

    이해찬은 16대 대선 때 노무현캠프 선거기획단장,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준비단장을 지내는 등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돌아와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 총리가 물러나자 국무총리에 발탁됐다. 노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이해찬에게 힘을 실어줬다.

    국무회의를 이해찬이 주재하고 노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만 참여했다. 이해찬은 인사 등에도 상당 부분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공개적 자리에서 “대통령 측근이나 사조직이 발휘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하며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유념하도록 당부하기도 하는 등 다른 총리들보다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대통령과 의견이 다를 때는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하기도 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입각을 놓고 의견을 달리하며 물러서지 않아 노 대통령이 “그러려면 총리를 그만 두라”고 했을 정도다. 

    ▲ 이해찬 국무총리가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이해찬 세대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교육 개혁정책을 펼쳤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이해찬 교육정책의 영향을 받은 세대를 '이해찬 세대'로 부른다. 20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02학번으로 입학한 1983년생이 이해찬 1세대, 2003년 졸업 후 03학번으로 입학한 1984년생이 이해찬 2세대다.

    이해찬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1998년 2월 제38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전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수시 전형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야간 자율학습, 월말고사, 학력교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했다. 내신 평가에 수행평가를 의무화한 것도 이 때다.

    상대적으로 면학 강도가 낮아지면서 이해찬 세대를 '단군 이래 최저 학력'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해찬 1세대가 치른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역대 최고로 어려웠던 1997학년도 수능에 버금갈 정도로 어려운 불수능으로 출제되면서 단 한 명의 만점자도 나오지 않아 이런 인식이 더욱 깊게 뿌리박혔다. 2002학년도 수능은 전년 대비 문과는 평균 98.2점, 이과는 91.3점이 하락했다.

    이해찬은 나중에 그의 교육정책이 학력저하를 낳았다는 논란과 관련해 인터뷰 등을 통해 '옳은 방향이었다'며 수능 대신 면접 등을 다양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는데 언론이 한 과목만 잘하면 대학에 간다고 잘못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학력 저하는 없었으며 '공부 못 했던 일부의 넋두리'라는 말도 했다.

    이 외에 학생 인권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체벌과 구타를 하지 못하도록 지침이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원산폭격 등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던 체벌과 구타가 크게 줄어들었다.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하고 교원 성과급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조치는 교원 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1999년 5월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 이해찬 민주당 의원이 1992년 14대 대선 때 노무현 의원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지원유세를 기다리고 있다.

    △세종시 애정 
    이해찬은 세종시 입안자로서 현재는 세종시 지역구 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은 “공직은퇴 후 세종시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등 세종시에 애착을 보였다.

    이해찬은 대선 때부터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기획하고 추진한 당사자다. 총리가 된 뒤에도 가장 중요한 국정 현안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꼽았고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록 수도 이전은 위헌 판결을 받았으나 중앙행정기관 등을 이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 신도시인 행복도시가 탄생하게 됐다. 행복도시는 이해찬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착공했고 2012년에는 지방자치단체로서 세종특별자치시가 설립됐다.

    이해찬은 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복귀할 때 세종시를 지역구로 선택했고 무난히 당선돼 20대 재선까지 성공했다.

    이해찬은 20대 국회에서 세종시 의원 숫자를 늘리고 자치조직권을 강화하는 세종시 특별법 개정안과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행복도시 특별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된 뒤에도 세종시 국회 분원(세종의사당) 설치를 주장하는 등 과거 세종시 구상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7선의 선거 이력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후보로만 출마해 7선을 했으며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민주당계 정당이 자주 이름을 바꾸면서 7선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이름의 정당으로 출마한 적이 없으며 무소속 출마가 한 번 있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31.18%로 당선됐다. 재선 의원이던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와 4선 의원이었던 김수한 통일민주당 후보를 꺾었다. 당시 35세로 13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14대 때도 역시 같은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4.69%의 득표율로 김수한 민주자유당 후보를 꺾었다. 15대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44.75%로 박홍석 신한국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16대 총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47.48%의 득표율로 권태엽 한나라당 후보를 제쳤다. 17대 때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해 41.11%를 득표해 김철수 한나라당 후보와 유종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꺾고 5선에 성공했다.

    18대 총선은 출마하지 않았으며 19대 총선에서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자유선진당 대표인 심대평 후보와 신진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47.8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개인 역대 최고 득표율을 보였다.

    20대 총선 때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정무적 판단을 내세우며 이해찬을 공천하지 않자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했다. 박종준 새누리당 후보와 문흥수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꺾고 43.72%를 득표하며 무난하게 당선됐다.

    당선된 후 9월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해 당내 최다선 의원이 됐다.

  • ◆ 비전과 과제

    ▲ 이해찬 민주평화당 후보가 1988년 김대중 평화민주당 의원과 함께 13대 총선 관악구 지지유세를 하고 있다.

    당대표 경선을 치르면서 발생한 당내 잡음을 추스리고 ‘원 팀’을 갖추는 일이 최우선이다. 이해찬은 민주당 워크숍에서 “원 팀 정신으로 당을 잘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9월3일에는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한 송영길 의원과 오찬을 함께 하며 당 운영을 논의했다.

    문재인 정부 2년차에 들어 떨어지고 있는 국정 운영 지지도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을 끌어 올려야 한다. 이해찬은 정부가 원활한 국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민주당이 공동운명체로서 일하겠다는 뜻을 내놓고 있다.

    이해찬이 실질적으로 겨누고 있는 목표는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 승리다. 이해찬은 9월1일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다음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둬서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닦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발 나아가 이해찬은 민주당의 장기집권 구상도 마련하고 있다.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완수하려면 4번 정도 연속집권이 필요하다며 20년 집권론을 펼친다. 그는 8월27일 취임 후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 정부 20년 집권 계획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년 집권론을 놓고 야당은 “독선적 발언”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수권정당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도 야당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은 이승만 박정희 묘역에 참배하고 경북 구미시청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여는 등 과거 보수진영에 정면으로 맞서던 강성 이미지를 내려놓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 평가

    ▲ 김대중 새정치민주연합 총재와 이해찬 정책위 의장.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14대 손이다.

    10월 유신으로 휴교령이 내려 고향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자 다시 상경해 학생운동 모임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름에서 기인한 '해찬들'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부엉이를 닮은 외모로 '대장 부엉이'라는 별명도 있다. 쌀쌀맞은 성격 탓에 지지자들 사이에서 '쿨한 부엉이', 약칭으로 '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낸 많지 않은 정치인 가운데 하나로 친노에서 친문으로 이어지는 계파의 좌장격으로 여겨진다.

    이해찬은 1987년 6월 항쟁 때 민통련 활동을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알게 됐고 1988년 13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으로 함께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초선인 이상수 의원까지 세 사람은 서로 정당은 달랐으나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위 3총사’로 주목을 받았다. 

    1997년 노무현 의원이 몸담고 있던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국민회의로 끌어들일 때 이해찬이 협상 대표로 나서 노 의원과 교섭했다. 1998년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이 됐을 때 노 의원은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이해찬을 지원했고 2000년 노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이 될 때 이해찬의 물밑 추천이 작용하기도 했다.

    이해찬은 2002년 노무현 선거대책본부의 기획본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측근으로 활동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 뒤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으로 이해찬의 발탁을 검토했고 결국 고건 총리의 후임으로 이해찬을 임명했다.

    취미는 바둑과 독서로 특히 책을 좋아하고 초기 경력에서 책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1978년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했다. 광장서적은 이해찬의 정계 입문 뒤 그의 동생이 운영했으나 2012년 12월31일 부도를 내고 폐업했다.

    출판사인 범우사, 평민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한마당’, ‘평민서당’ 등을 설립했다가 불온서적 출판을 이유로 등록이 취소됐다. 이후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해 사회과학 서적을 냈다. 출판사 이름은 장준하 선생의 저서 돌베개에서 따왔다.

    이런 성향이 이어져 교육부 장관 시절 국가 차원에서 학교도서관활성화 종합방안 등 독서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사업으로 2002년 학교도서관 설치율이 80.4%에서 2008년 95.1%까지 늘어나고 1인당 장서 수는 같은 기간 5.5권에서 12권으로 증가했다.

    7선 의원, 국무총리, 당대표 등을 지내면서 많은 인맥을 구축했고 이들은 문재인 정부 요직에도 포진해 있다.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비서실장이었고 정태호 일자리수석은 13대 의원 시절 보좌관이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총리 시절 시민사회비서관이었고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민주통합당 대표 비서실장 출신으로 원내 지도부와도 각별한 사이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융통성이 없고 깐깐하다, 야박하고 인정이 없다는 식의 평가도 받는다. 2004년 박창식 기자가 펴낸 평전 ‘쿨하게 출세하기’에서는 이해찬이 인간성 좋은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다며 날카로운 외모처럼 면도날 같은 성격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1997년 이해찬이 탄 차가 다급한 일정으로 이동 중 불법 유턴을 하다 교통순경에게 적발된 일이 언급된다. 교통순경이 시간을 끌며 범칙금 흥정을 하려 하자 이해찬은 의원 신분증을 보여줬고 놀란 교통순경은 그냥 가라고 했다. 이에 이해찬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안되겠다 차에 타라”며 마포경찰서로 교통순경을 데려가 인계했고 순경은 조사 뒤 10일간 영창을 갔다고 한다.

    1988년 지역구인 신림동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른 건설사의 중역이 찾아와 현금 보따리를 건네려 하자 “콩밥을 먹이겠다, 끌어내라”고 호통을 친 일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 총리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함께 일했던 유시민 전 장관과 친밀한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 시절 총학생회와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는데 당시 총학 간부였던 유시민 전 장관과 멱살잡이를 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한 뒤 운동권 선후배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해찬이 여의도에 입성한 뒤 유 전 장관을 보좌관으로 영입해 정계 발판을 놓아줬다. 유 전 장관이 독일 유학 시절 생활고에 처하자 이해찬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전문위원 자리를 연결해 주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은 이해찬을 인생의 스승으로 꼽으며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생각이 바르고 간사함이 없다는 의미로 사무사(思無邪)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이해찬은 유 전 장관을 놓고 “유시민 본인이 정치 안하고 지식인 활동을 하겠다는데 조금 더 나라를 위해 퍼블릭 섹터에서 일을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해찬은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시민 전 장관을 내정하자 이에 반대하며 고성이 오갔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려면 총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찬은 유 전 장관 입각에 여당 의원이 반발하고 있어 당장이 아닌 차기나 차차기 장관으로 미루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3선 의원 시절 이훈평 전 의원의 권유로 뒤늦게 골프에 입문했는데 많을 때는 한 주에 3~4번 씩 골프를 칠 정도로 골프에 푹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 시절 국무위원이나 경제단체장들과 골프를 치며 현안을 논의하는 골프회동을 자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도 산불, 남부지방 호우, 3·1절 기념식 등의 일이 있을 때도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이 알려지면서 총리직 수행에 발목을 잡기도 했다.

    종교는 무교다.

    ◆ 사건/사고

    ▲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2012년 6월9일 제2대 민주통합당 대표에 선출됐다.

    △보수언론과 반목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이른바 보수언론과 관계가 좋지 않다. 2004년 총리 시절 거침없는 발언이 보수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지자 독일 베를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나라를 흔들던 밤의 대통령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용서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역죄는 용서못한다”며 “조선과 동아가 나라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 안기부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역사 발전에는 기여한 일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강하게 반발했다. 조선일보는 “조선 동아는 총리가 태어나기 전에 창간돼 나름대로 싸워왔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동아일보는 “개혁을 빌미로 자유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정부여당이야말로 역사에 반역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이해찬은 2004년 10월2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유신 긴급조치 때 자유 언론을 주장한 수많은 기자들을 집단해고하고 다시 복직시키지 않았다”며 “시대에 반하는 행위이자 역사의 반역”이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해찬은 2006년 3월1일 3·1절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고 골프모임에 참석해 논란이 됐는데 특히 보수언론이 공격의 선봉에 서며 집중 포화를 쏟아냈다. 결국 이해찬은 2주 만에 총리에서 물러났다.

    2012년 YTN라디오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 인터뷰 중 당초 주제인 대표 경선과 관련된 질문 대신 북한 인권법 추진과 임수경 의원의 막말 파문 등을 질문 받자 “언론이 왜 인터뷰를 이렇게 하냐”며 “취지에 맞는 질문을 해야 답변을 한다”고 격분하며 생방송 도중 전화를 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해찬은 트위터를 통해 “청취자들에게 죄송스럽다”며 “보수언론이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는데 진행자가 당초 약속을 파기하고 취지에 벗어난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고 해명했다.

    이해찬은 보수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로 나왔을 때 “수구언론과 새누리당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2018년 8월25일 전당대회 정견 발표문에서도 “저 이해찬은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
    2004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대부도 땅 취득과 관련해 투기 의혹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이해찬의 배우자가 2002년 경기도 안산 토지를 취득했는데 영농경력이 없음에도 농지 취득 자격증명 신청서에 15년의 경력이 있다고 기입했다. 또 김씨가 토지를 구입할 때 배우자가 공업사 대표라고 신분을 속였으며 우리은행에서 1억2천억 원을 대출받고도 재산신고 내역에 누락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의 토지는 대부도 개발계획에 따른 개발지역에 속해 있고 거래 당시 3.3㎡당 25만 원에서 35만 원으로 가격이 올라 투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해찬은 “장인이 돌아가면서 상속금을 주시면서 주말에 농사라도 지을 수 있는 땅을 하나 사라 하셨다”며 구입 경위를 해명했다. 또 포도 농사와 밭작물을 심는 등 영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팔 생각은 전혀 없다고도 말했다.

    이해찬의 해명에 부동산 투기 논란은 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임명동의안은 2004년 7월29일 본회의에서 재적 289명 중 찬성 200명으로 통과됐다.

  • ◆ 경력

    ▲ 중학교 시절 이해찬.

    1978년 광장서적 대표를 지냈다.

    1979년 돌베개출판사 대표를 지냈다.

    1980년 서울대학교 복학생협의회 대표,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정책실 차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과 부대변인,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일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역임했다.

    1988년 민주평화통일연구회 상임이사와 연구소장을 지냈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13~17대 국회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1991년 신민주연합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1992년 민주당 당무기획실장을 거쳤다.

    1995년 제31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제38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단장을 맡았고 2004년 열린우리당 외부인사영입추진위원장과 국회개혁추진단장 등을 지냈다.

    2004년 제36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2009년 시민주권 상임대표를 맡았다.

    2011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2012년 세종시를 지역구로 민주통합당 소속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2년 6월부터 11월까지 민주통합당 당대표를 지냈다.

    2014년 제4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 무소속으로 20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19대 대선 문재인 후보 선대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 베이징을 다녀왔다.

    2018년 8월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 학력

    1965년 2월 충남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2월 서울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2월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8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친은 이인용씨, 모친은 박양순씨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 이씨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는데 해방 후 32세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다.

    대학 시절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다니던 김정옥씨를 만나 1978년 결혼했다. 김씨와 사이에 딸 이현주씨를 두고 있다.

    ◆ 상훈

    1996년 6월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3년 2월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기타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1989),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등의 책을 썼다.

    ‘사회학적 상상력’(2004), ‘세계환경정치’(1994), ‘돔 헬더 까마라’ 등의 책을 번역했다.

    2018년 배우자 명의의 서울 관악구 아파트와 세종시 주택 등 6억 원대 부동산을 포함해 모두 8억2665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수형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 ◆ 어록

    ▲ 이해찬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1995년 조순 서울시장과 함께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풍요를 넘어 국민 개개인이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주권자로서 자랑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유능한 정치, 내 노력과 필요에 비례해 공정하게 분배받고 대우받는 경제, 삶의 전 주기에서 편안하고 안심하며 살 수 있도록 보호받는 사회, 자율과 참여 속에 내 삶이 풍요로운 지역 공동체, 평화와 협력 속에 함께 발전하는 한반도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의 약속이다.” (2018/09/04,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문재인 정부는 민주당 정부다라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공동운명체로서 함께 하겠다. 당을 잘 이끌어서 문재인 정부가 원활하게 국정을 운영하도록 하고 다음 총선에서 아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서 무조건 정권을 재창출하는 기반을 닦는 일이 당이 할 일이다.” (2018/09/01, 당정청 전원회의 인사말)

    “민주정부 20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야 한다. 겸손한 자세로 일관되고 꾸준하게 준비해야 한다. 2020년 총선까지 몇 차례의 큰 파도가 우리 당을 휩쓸지 모른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철통같은 당의 단결이다. 사심 없이 당의 단결을 이끌 노련한 선장이 필요하다. 지금은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원 팀이 되어 똘똘 뭉쳐 싸울 것이다.” (2018/08/18, 민주당 대표 후보 경선 합동연설회)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을 일곱 번 했고,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는 책임총리라는 명예도 얻었다. 남은 것은 국민들과 당원동지들께서 주셨던 신뢰와 사랑에 대한 보답할 책임뿐이다. 이 시대의 포로가 돼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다. 민주당의 20년 집권플랜을 만들어 내겠다.” (2018/07/26, 민주당 대표 예비경선 연설문)
    “문재인 정부 집권 전반기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회담의 실효성과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간 경험상 집권 후반기에 정상회담을 하면 합의를 해도 실질적인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년 평창올림픽 등 다원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2017/12/07, 페이스북에 올린 글)

    “한중 관계가 아주 경색돼 있다. 경제교류, 한류, 인적교류, 관광 등 이런 부분들에 대해 많이 풀어내는 데 역점을 두려고 한다. 오는 7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1차 한중 정상회담을 할 수 있고, 한중 수교 25주년인 8월24일께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7/05/18, 중국 특사 출국에 앞서 기자들에게)

    “사랑하는 더불어민주당에서 정권교체와 세종시 완성의 밀알이 되겠다. 3월15일 당을 떠나면서 세종시민들의 뜻을 묻고 당당히 승리해 제 영혼과도 같은 더불어민주당에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당에 복귀하여 민생위기, 민주주의 위기, 한반도 평화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호를 구하기 위해 분골쇄신하겠다.” (2016/09/30, 더불어민주당 복당 성명)

    “저는 부당한 것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의에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러한 잘못된 결정은 용납할 수 없다.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 잠시 제 영혼 같은 더불어민주당을 떠나려고 한다. 이번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 세종시 완성과 정권교체를 위해 돌아오겠다.” (2016/03/15, 공천 배제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며)

    “국정원을 누가 만들었나? 옛날 중앙정보부를 누가 만들었나? 박정희가 누군가? 박정희가 누구한테 죽었나? 김재규가 누군가? 그 박씨 집안은 중앙정보부, 안기부하고 그렇게도 인연이 질기다. 이제 끊어라. 이제 국정원과 정말로 단절하고 끊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라. 그래야 당신의 정통성이 유지가 된다. 자꾸 미워하고 거짓말하면 오히려 갈수록 당선 무효까지도 주장할 수 있는 세력이 더 늘어나게 된다. 정통성을 유지하려면 이제 그 악연을 끊어라.” (2013/07/14,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대회)
    “대통령께서 퉁퉁 불은 국수를 먹게된 경제가 불쌍하다고 했는데 그건 국가원수의 언어가 아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사고 능력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사돈 남 말하듯이 유체이탈 화법으로 말하면 안된다.” (2015/02/25,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이 추구하는 경제민주화는 공정경쟁과 분배정의를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이 상생하는 경제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무너져 내린 중산층을 다시 복원하자는 것이다. 상생, 동반성장, 균형발전을 통해 따뜻한 시장경제, 품격 있는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다. 수십 년 간 이어져온 재벌과 특권중심의 경제기조를 '민생중심경제'로 대전환하자는 것이다.” (2012/09/05,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누구나 민생을 말하지만, 아무나 민생을 책임질 순 없다. 누구나 경제민주화를 말하지만, 아무나 경제민주화를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민주당이 국민 여러분과 함께 민생을 살리겠다. 경제민주화 반드시 실현하겠다. 서민과 중산층도 함께 잘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겠다.” (2012/07/17, 민주통합당 대표 라디오 연설문)

    “이런 종합편성채널은 존속하는 것 자체가 암적인 존재가 되는 거다. 다시 집권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주파수를 회수하는 방법이 있겠고, 아니면 방송통신위원회를 여론 다양성과 품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시 만드는 방법이 있겠다. 대선 공약으로 해야 한다.” (2011/01/17, 한겨레 인터뷰)

    “미국의 하버드 케네디 스쿨과 같은 '노무현 스쿨'을 만들겠다. 좋은 정치를 위한 정책대학원 성격을 띨 것이다. 앞으로 4,5년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해 나가겠다.” (2009/07/29,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사업회 기자간담회)

    “17대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해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데 책임을 다하겠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깊이 성찰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검증된 후보로서 검증된 대통령이 돼 국민의 정부가 씨를 뿌렸고, 참여정부가 잘 가꾼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계일류로 도약시키겠다.” (2007/06/19, 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일하는 총리로서 신명을 다하겠다. 모든 부처, 모든 공직자가 소신껏 일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정부 전체의 조화가 이뤄질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부패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구조적인 부패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꿔나가겠다.” (2004/06/30, 국무총리 취임사)

    “이제 교육정책은 국가주도가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 등 수요자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사교육비 절감과 입시고통 완화에 주력하겠다.” (1998/03/04, 교육부 장관에 취임한 뒤)

    “남녘땅 광주 등지에서 무수한 동포들이 비명에 사라져 갔는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당신들의 총칼에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원혼이 구만리 청청 하늘에 떠돌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한 잠을 자겠는가, 이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은 이 땅을 민주화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목숨을 다바쳐 이 땅이 민주화 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전두환 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 (1980년 비상군법회의 재판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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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양정철 “유시민 정계복귀 해야”, 유시민 “자기 머리는 못 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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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오늘Who] 김용익, 문재인 건강보험 시행에 재정 확보방안은 빈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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