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


황영기는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지냈다.

삼성그룹의 대표적 ‘금융통’ 출신으로 삼성그룹을 떠난 뒤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금융투자협회장 등을 맡으며 주요 금융이슈에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제시하는 ‘검투사’의 면모를 보였다.

1952년 10월29일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물산과 삼성그룹 비서실,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등을 역임하면서 삼성그룹에서 금융전문가로 꼽혔다.

삼성그룹에 재직하던 시절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금융에 대해 조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았던 인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 사장단 모임인 '7인 위원회' 멤버에 포함될 정도로 그룹 내 위상이 있었다.

해외금융회사인 뱅커스트러스트은행과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국제금융분과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금융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삼성그룹을 떠난 뒤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과 KB금융지주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투자손실의 책임과 국민은행장 시절 카자흐스탄 BCC’ 지분 인수 책임 등 공격적 사업추진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지만 대법원 판결로 명예를 모두 회복했다.

2018년 1월 임기를 마치고 금융투자협회장에서 물러났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평소 최고경영자(CEO)는 검투사와 같다고 주장하는 데다 우리은행장 시절 “금융대전에서 죽을 각오로 싸워달라”며 영업본부장에게 지휘봉을 선물했는데 지휘봉 속에 단검이 있어서 ‘검투사’라는 별명이 생겼다.

지휘봉을 받은 본부장은 검을 발견한 뒤 ‘목숨을 걸고 목표를 달성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한다. 다만 황영기는 지휘봉을 선물하려했을 뿐 지휘봉 안에 단검이 숨겨져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검투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공격적인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을 지녔따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투신운용은 황영기가 대표로 있던 당시 '선량한 청지기정신'을 내세웠다. 고객의 재산을 신의와 성실, 최선의 노력으로 관리하고 고객이 만족할만한 수익률을 통해 안정적으로 증식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투신운용사에게 부여된 임무라는 신조다.

기본이 돼야만 제대로 된 자산운용이 가능하다는 황영기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민감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승부수를 던지는 승부사적 기질과 전략가적인 면모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은행 회장 시절 임직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직원들에 대한 상여금 지급,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약정(MOU) 개정문제 등에서 자기 목소리를 뚜렷이 냈다. 금융투자협회장에 올라서도 증권업계가 부딪힌 이슈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황영기’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서슴없는 행동들은 우리은행 시절 대주주인 정부와 마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반대로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 ‘스타 최고경영자(CEO)’라는 평가를 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특유의 도전정신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유학을 떠났을 때와 뱅커스트러스트를 거쳐 삼성으로 복귀했을 때, 삼성그룹을 떠나 우리금융지주로 옮겼을 때, 삼성 비자금 논란을 무릅쓰고 KB금융지주 회장에 도전했을 때 등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다양한 현안과 도전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세마나 등에서 강연을 직접 챙겨 듣는 ‘공부하는 협회장’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스스로 “내가 말하는 내용의 80%가 최근 2년 동안 보고 듣고 읽은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경제 서적뿐 아니라 역사책과 과학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독서는 사마천의 사기다.

금융투자협회 직원들에게 두렵지만 배우고 싶은 상사로 통한다. 다양한 분야의 최고경영자 전력과 카리스마가 뚜렷한데다 세부 업무내용을 실무자보다도 더 꿰고 있어 취임 초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금융투자업이 나갈 방향과 맥을 짚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 지적 자극을 주는 회장이란 의견이 나온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5년 1월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삼성그룹 영어경시대회’에서 문법과 회화부문 1등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1978년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으로 옮겼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한 뒤 영국 런던정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82년 8월 뱅커스트러스트은행에 입사해 서울지점에서 근무했다.

1986년 6월 뱅커스트러스트 인터내셔널 동경지점에서 국제자본시장부 부사장에 올랐다.

1989년 5월 삼성그룹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 팀장을 맡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룹에서 입지가 탄탄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10월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인사팀 팀장으로 근무했다.

1994년 3월 삼성전자 자금팀 팀장을 맡아 수십 차례의 해외 기업설명회(IR)를 진행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재무이사(CFO)로 꼽혔다.

1997년 1월 삼성생명 전략기획실 실장에 올라 삼성증권 구조개혁과 동양투신 인수를 진두지휘해 지금의 삼성그룹 금융계열의 틀을 갖추는 역할을 했다.

1997년 5월 한미은행 비상임이사를 맡았다.

1998년 9월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국제금융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99년 8월 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삼성투신운용과 삼성생명투신운용을 합병했다.

2000년 3월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증권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 6월 삼성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다.

2004년 3월 삼성그룹을 떠나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겸 우리은행 은행장에 올랐다.

2006년 12월 한국종합예술학교 발전기금 이사를 겸임했다.

2007년 2월 우리금융지주 회장 연임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뒤 6월 법무법인 세종 고문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 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대선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7월 KB금융지주 회장에 올랐지만 우리은행장 시절 투자한 파생상품의 부실이 드러나 1년여 만인 2009년 9월 자진사퇴했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한국경제교육협회 회장을 맡았다.

2010년 1월부터 2012년까지 차병원그룹 부회장 겸 차바이오앤디오스텍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2012년 8월 법무법인 세종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3년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 부실과 관련한 징계취소 행정소송에서 3년여 만에 승소해 명예를 회복한 뒤 금융투자협회 공익이사를 맡으며 다시 금융권으로 돌아왔다.

2015년 2월부터 제3대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맡았다.

2018년 1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 학력

1971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 무역학 학사를 받았다.

1981년 런던대학교 정치경제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1남 1녀를 두고 있다.

◆ 상훈

◆ 상훈

어록


“앞으로의 금융은 이종격투기처럼 장르에 상관없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채널의 시대에서 시장의 시대로 옮겨가는 만큼, 증권업과 관련된 각종 제도도 변경될 필요가 있다.” (2016/07/12, 금융투자협회 기자간담회에서)

“금융 규제의 90%는 사실 소비자와 시장이 원해서 만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정부에 ‘안전한 시장’, ‘수익률 높은 시장’, ‘금융 소비자가 보호받는 시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하는 시장은 없다. 소비자가 보호받는 시장에선 금융회사들의 활동이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국민의 주문이 법과 제도로 바뀌면서 금융 산업을 계속 조여 왔다.” (2016/03/14,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증권업계가 정신을 못 차리면 편의점업체 같은 일반기업이 금융을 지배할 수 있다. 인터넷 도입으로 금융주권은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넘어갔다. CU, GS25 같은 편의점도 주식이나 펀드, 보험을 망라하는 모든 금융서비스를 할 수 있다.” (2016/01/04, 금융투자협회 기자간담회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스타일인 제가 이만큼 크고 따르는 사람도 제법 있었던 것은 사람만큼은 차별하지 않고 능력 중심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2015/10/28,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기업들은 회사를 키우려는 생각이 없다. 반대로 삼성이 세계 1등,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고 헌신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대결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삼성을 도와 헤지펀드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필요하다.”(2015/07/16, 기자간담회에서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분쟁에 대해 말하면서)

“직장과 가정의 균형은 없다.”(2015/04/03,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직장에 헌신하고 개인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회사 내의 기대치를 낮추라는 뜻으로)

“야구만큼 자본시장과 닮은 스포츠가 없다. 여러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경기를 펼치고, 통계에 기반하며,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자본시장과 똑같다.” (2015/02, 금융투자협회장에 오른 뒤 평소 지론으로 밝히며)

“전문 경영인이라는 운명을 평생 안고 살았다. 자기 브랜드가 있는 전문 경영인이 되고 싶었다. 검투사라는 별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업은 경제전쟁을 치르는 조직이다. 지면 죽는다. 그 절박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최고경영자(CEO)라면 검투사와 같은 자세를 갖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2013/04/03,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검투사’ 별명을 좋아하진 않는다며)

“국내 은행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국가대표급 은행이 나와야 하며 해외시장에서도 상호 경쟁을 통해 승자가 그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다” (2007/01/28,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우리은행의 역사성과 맨 파워(man power)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시도 우리은행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과거의 승리에 대한 본능을 되살린다면 충분히 1등 은행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저의 평소 지론인 지면 죽는다는 검투사의 정신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던 지난 3년이었습니다.” (2007/03/26, 우리은행장 이임사에서)

“금융대전에서 승리했다는 첫 번째 지표는 주주가치 극대화다. 주주가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금융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주식시장에서 어떤 것을 요구하는 지 관심을 갖고 영업해야 한다.” (2005/03/10, 우리은행장시절 ‘월례조회’에서)

“사람의 몸을 다루는 의사처럼 고객의 돈을 다루는 자산관리사도 전문지식을 갖춰야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 (2001/07/08,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약정고에 연연해 하지 않고 고객에게 이익을 남겨주는 정도(正道)경영을 하겠다. 영업직원들 평가도 약정고, 회전율 위주의 과거방식에서 탈피해 고객 수익률 중심으로 바꿔나갈 생각이다.” (2001/06/04, 삼성증권 사장 시절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증권업계 발전 방안을 말하면서)

◆ 평가

평소 최고경영자(CEO)는 검투사와 같다고 주장하는 데다 우리은행장 시절 “금융대전에서 죽을 각오로 싸워달라”며 영업본부장에게 지휘봉을 선물했는데 지휘봉 속에 단검이 있어서 ‘검투사’라는 별명이 생겼다.

지휘봉을 받은 본부장은 검을 발견한 뒤 ‘목숨을 걸고 목표를 달성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한다. 다만 황영기는 지휘봉을 선물하려했을 뿐 지휘봉 안에 단검이 숨겨져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검투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공격적인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을 지녔따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투신운용은 황영기가 대표로 있던 당시 '선량한 청지기정신'을 내세웠다. 고객의 재산을 신의와 성실, 최선의 노력으로 관리하고 고객이 만족할만한 수익률을 통해 안정적으로 증식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투신운용사에게 부여된 임무라는 신조다.

기본이 돼야만 제대로 된 자산운용이 가능하다는 황영기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민감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승부수를 던지는 승부사적 기질과 전략가적인 면모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은행 회장 시절 임직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직원들에 대한 상여금 지급,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약정(MOU) 개정문제 등에서 자기 목소리를 뚜렷이 냈다. 금융투자협회장에 올라서도 증권업계가 부딪힌 이슈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황영기’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서슴없는 행동들은 우리은행 시절 대주주인 정부와 마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반대로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 ‘스타 최고경영자(CEO)’라는 평가를 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특유의 도전정신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유학을 떠났을 때와 뱅커스트러스트를 거쳐 삼성으로 복귀했을 때, 삼성그룹을 떠나 우리금융지주로 옮겼을 때, 삼성 비자금 논란을 무릅쓰고 KB금융지주 회장에 도전했을 때 등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다양한 현안과 도전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세마나 등에서 강연을 직접 챙겨 듣는 ‘공부하는 협회장’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스스로 “내가 말하는 내용의 80%가 최근 2년 동안 보고 듣고 읽은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경제 서적뿐 아니라 역사책과 과학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독서는 사마천의 사기다.

금융투자협회 직원들에게 두렵지만 배우고 싶은 상사로 통한다. 다양한 분야의 최고경영자 전력과 카리스마가 뚜렷한데다 세부 업무내용을 실무자보다도 더 꿰고 있어 취임 초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금융투자업이 나갈 방향과 맥을 짚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 지적 자극을 주는 회장이란 의견이 나온다.

◆ 기타

종교는 기독교이고 취미는 골프와 테니스로 알려졌다.

점수가 모자라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뒤 운동부로 유명한 경동중학교에 들어갔다. 경동중학교를 다니며 운동을 무척 좋아하게 됐는데 특유의 승부근성은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 특히 당시 탁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졌는데 2001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시구자로 나와 빠른 볼을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집어넣어 화제가 됐다. 당시 허구연 프로야구 해설위원이 “시속 120km는 될 것 같은 공”이라고 평했다. 실제로는 시속 80~90km 정도로 알려졌다.

1990년 대 중반 삼성전자에서 근무할 때 야구 동호회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삼성증권 사장 시절에 프로야구를 후원하면서 애정을 더 품게 됐다고 한다.

인생을 바꾼 영어 실력은 고등학교 시절 쌓았다. 좋아하던 팝송 200여 곡의 가사를 모두 외운 뒤 팝송을 원곡대로 따라 부르다 보니 발음이 좋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