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Who] 삼성전자 인수합병 신중, 이재용 내년엔 '벤처 씨앗' 뿌린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사진)이 경기침체 분위기에 대응해 대형 인수합병에 신중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내년에는 신기술을 지닌 벤처기업에 투자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비즈니스포스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기 침체 분위기에 대형 인수합병에 대해 신중한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이 회장은 대신 신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에 투자해 삼성전자의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씨앗을 뿌릴 것으로 예상된다.
 
21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이 회장이 시장의 관심이 높았던 영국의 반도체 설계기업 ARM에 대한 지분투자 방안을 사실상 접었다는 시선이 나온다. 

올해 이례적으로 한국을 2차례 방문했던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와 이 회장의 만남이 불발된 것도 ARM인수를 위한 반도체 기업 사이 컨소시엄 구성 논의가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관측에 힘을 보탠다.

ARM은 독보적 반도체 설계 기반기술을 가진 업체로 예상 인수가격이 600억 달러까지 거론되는 반도체업계의 대표적 대형 매물로 꼽힌다.  

이 회장이 이처럼 신중하게 대형 인수합병에 접근하는 것은 글로벌 경기 침체가 내년에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억만장자 투자자인 세쿼이아캐피탈의 더글라스 레오네는 내년 세계 경제가 2000년 IT버블 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 보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CNBC에 따르면 레오네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스타트업 행사에 참석해 경기 침체가 2024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회장은 올해 초 한종희 삼성전자 DX부문장 겸 대표이사 부회장을 통해 인수합병 의지를 밝혔던 것과 달리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자 신중한 접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삼성전자의 주력 캐시카우 사업인 메모리 반도체쪽에도 한파가 불어닥치면서 섣부르게 인수합병에 나서는 것은 사업 리스크를 키우게 된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은 재고의 증가와 제품 가격 하락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4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추산치를 기존 7조8천억 원에서 5조8200억 원으로 25% 하향 조정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영업이익 13조8667억 원과 비교해 58%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경기침체로 스마트폰과 TV 등 정보기술 제품의 출하량이 감소하면서 반도체 사업도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

삼성전자는 업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인위적 감산을 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증권업계에서는 경영전략을 바꿀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김양재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가 감산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내년 2분기 적자전환이 불가피하다”며 올해 4분기 실적 발표에서 감산계획을 밝힐 가능성이 있다고 바라봤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서도 대만 TSMC와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이 회장이 새 인수합병을 추진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는 현재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빅딜보다는 파운드리 등 기존 사업 투자에 집중하면서 한편으로 신기술 확보에 필요한 벤처기업 투자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8월 앞으로 3년 동안 로봇, 인공지능, 바이오 등 신사업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특히 삼성그룹 아래 벤처투자회사가 이런 방침을 꾸준히 실천하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바이오 헬스케어 분야에서 주목되는 투자로는 독일 헬스케어 기업 디아몬드테크 투자와 인도네시아 원격의료 플랫폼 ‘알로독터’에 대한 투자를 꼽을 수 있다.

디아몬드테크는 당뇨병환자들이 혈당체크를 할 때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거나 별도의 채혈을 하지 않고 혈당수치를 관리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삼성그룹 벤처캐피탈인 삼성벤처투자가 디아몬드테크에 투자를 감행한 것은 삼성전자의 웨어러블 기기인 갤럭시 워치 시리즈의 관련 기능 탑재를 고려한 행보로 풀이된다. 무채혈 혈당 모니터링 기능은 차세대 스마트워치의 핵심기능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벤처투자가 올해 추가투자를 진행한 인도네시아 알로독터는 원격의료와 진료예약, 의료·건강정보, 온라인 약국, 건강보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낙후된 의료 인프라와 섬지역의 의료기관 접근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2016년 원격의료를 도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 더 자카르타포스트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규모는 2010년 200억 달러 규모에서 2025년 363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투자 자회사 삼성넥스트를 통해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벤처기업 투자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올해 9월에는 인공지능 학습플랫폼 다이나모FL에 투자를 진행했으며 올해 초에는 인공지능에 기반이 될 기술을 개발하는 이스라엘 양자컴퓨팅 스타트업 클래지큐에 투자를 감행하기도 했다.

다이나모FL은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원들이 설립한 스타트업으로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으면서 고성능의 하드웨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머신러닝 모델 훈련 솔루션을 개발했다.

다이나모FL은 간결한 머신러닝 학습솔루션을 통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백만 개의 장치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클래지큐는 양자컴퓨터 소프트웨어 ‘퀀텀 알고리즘 디자인’ 플랫폼을 개발한 회사다. 클래지큐는 2020년 5월 설립돼 양자회로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20개월 만에 48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모으기도 했다.

양자컴퓨터는 물리량의 최소 단위인 양자를 활용한다. 현재 가장 빠른 이진법 기반의 슈퍼컴퓨터보다 이론상 연산속도가 1천만 배 이상 빨라 정보보안, 금융과 의료, 제약, 자동차, 항공우주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다.

삼성그룹 투자회사들이 진행한 일련의 투자방향성을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이제까지 키워온 반도체사업 및 헬스케어사업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

이 회장은 내년에도 이와 같은 벤처회사들에 투자하면서 경기회복 국면이 다가오면 빅딜을 성사시킬 준비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인수합병은 투자자 보호 등 제반사항을 고려할 때 대외기밀 사항이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조장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