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와 경제] LG와 GS의 아름다운 동행 낳은 화목한 산천 정기

▲ 경남 의령 솥바위 아래 남쪽 진주 승산리에선 구인회 회장과 허만정 선생이 태어나 엘지와 지에스의 전신인 금성을 세웠다. 두 가문은 신의를 잘 지켜 60년 가까이 화목하게 공존하다 2005년에 엘지와 지에스로 분리 독립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LG트윈타워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GS타워.  

[비즈니스포스트]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마을 앞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이 흐릅니다. 이 남강에 솥바위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솥바위는 한자로 정암인데 정암리라는 마을 이름도 이 솥바위 때문에 지어진 것입니다.

예전에 솥바위 옆에는 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는데 나루의 이름은 정암진이었습니다. 정암진은 임진왜란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께서 남강 북쪽으로 진격하려던 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신 곳입니다. 훗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정암루라는 누각도 세워졌습니다.

솥바위는 커다란 가마솥처럼 생겼는데 밑바닥에는 가마솥의 발 같은 형상의 바위 줄기가 세 개 있다고 합니다. 조선조 후기 어느 이인이 남강에 솟아오른 솥바위를 보고 이런 예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솥바위에 발이 세 개 있는 것처럼 앞으로 솥바위에서 삼십리 안쪽에 있는 세 마을에서 대부호가 나와 많은 백성을 먹여 살릴 것이다.`

이 예언대로 솥바위 북쪽 의령 중교리에선 이병철 회장이 태어나 삼성을 세웠고 동남쪽 함안 동촌리에선 조홍제 회장이 태어나 효성을 창업했으며 남쪽 진주 승산리에선 구인회 회장과 허만정 선생이 태어나 LG와 GS의 전신인 금성을 세웠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세 그룹의 직원으로 일해왔으니 조선시대 어느 이인의 혜안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솥바위 남쪽 7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방어산이 있습니다. 방어산에서 직선거리로 3키로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괘방산이 있습니다.

괘방산과 방어산은 독립된 별개의 산이 아니고 하나의 산능선에 서로 떨어져 솟아오른 봉우리들입니다. 괘방산에서 방어산으로 이어진 주능선에는 여러 개의 큰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노적더미들과 같습니다.

이 형상을 보고 옛날의 어느 풍수사가 방어산 정기로 대부호들이 연달아 나오리라 예언했다고 합니다.

괘방산에서는 산맥 하나가 서쪽으로 유장하게 뻗어 가는데 중간중간에 노적 같은 봉우리들을 솟아올리며 둥글게 휘돌아 괘방산 북쪽에 이릅니다.

여기서는 반월형으로 휘어지며 뻗어 있는데 그 안품에 승산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산줄기가 팔을 넓게 벌려 마을을 따뜻이 안아주는 것 같은 형상으로 승산마을터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형의 명당입니다. 

또 앞쪽으로 멀리 괘방산이 보이는데 마을 주산을 만든 산맥이 괘방산에서 뻗어왔으니 괘방산은 주산의 뿌리이자 조상이 되는 산입니다. 조상이 되는 산을 조산이라 부릅니다. 멀리 앞쪽에 보이는 산도 조산이라 부르는데 이 조산은 한자로 아침 조자를 씁니다.

조상이 되는 산은 할아비 조자를 씁니다. 승산마을 터처럼 조산이 앞에 보이는 형국을 회룡고조형이라고 합니다. 회룡고조형의 명당은 특별히 큰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승산마을의 주산에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토성의 봉우리와 둥그런 금성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습니다. 둘 모두 부호를 배출하는 기운을 품고 있는데 두 봉우리가 서로 기운을 북돋워주니 그 역량이 더욱 커집니다.

또 주산이 단정하게 생긴 토성이면 부호와 함께 품성이 후덕하며 너그러운 대인 군자와 같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승산마을 좌우로는 청룡 백호가 다정하게 살짝 마을을 안아주는 형상으로 뻗어 있습니다. 청룡 백호가 이런 형상이면 형제자매 이웃들이 화목하게 지냅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위해주고 협력하고 배려하니 평화로운 마을이 됩니다.

승산마을은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의 집성촌입니다. 김해 허씨는 600년 전부터 여기서 살았고, 능성 구씨는 300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두 가문은 300년 동안 사이좋게 공존해왔습니다.

승산마을의 앞쪽에는 노적처럼 생긴 산봉우리들이 많습니다. 크고 작은 노적봉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습니다. 노적봉이 이렇게 많으면, 부호 또한 많이 나옵니다. 조선조 말엽 승산마을엔 만석군이 둘, 천석군은 열넷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승산마을 한가운데로는 승산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릅니다. 또, 마을 앞쪽에는 지수천이 마을을 감싸안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마을 끝에서 승산천과 합류합니다.

합류한 물이 흘러 나가는 수구에는 노적처럼 생긴 청룡과 방어산의 지봉이 냇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어 물 나가는 모습이 안 보입니다. 수구가 이런 형상이면, 들어오는 재물을 잘 모으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아서 재물이 쉽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조선조 말엽부터 일제시대 중반까지 승산마을에 허준이란 만석꾼이 살았습니다. 그는 대부호지만 청렴하고 의로운 선비였습니다. 조선조 중엽 이후 경상도 서부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 조식 선생을 지극히 흠모하여 선생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실천한 분입니다.

허준 선생은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선 짚신을 벗고 맨발로 걸어 다닐 정도로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았으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나라 잃은 우리 겨레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세웠고, 많은 돈을 기부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허준 선생의 아들인 허만정 선생은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을 돕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또, 빈민 구제에 힘썼으며, 천대받던 백정 분들의 인권운동이었던 진주 형평사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는 부자들에게 귀감이 될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잠시 보관하는 것이다.`

선생의 이 말은 부자의 참된 소명과 품격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리한 명언입니다.

허만정 선생은 부친과 함께 인근 고을에서 최초로 신식 학교인 지수초등학교를 세웠습니다. 처음 개교했을 때 LG 구인회 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 그리고 효성 조홍제 회장이 입학하여 함께 동문수학했으니 이 또한 특별한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의 장남인 허정구 회장은 이들보다 좀 늦게 몇 년 후 지수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운영할 때 선생이 사업자금을 보태며 장남을 사업에 동참시켜 달라 부탁했습니다.

이 회장은 흔쾌히 수락했고, 허정구 회장은 1961년 독립할 때까지 이병철 회장과 함께 삼성이 성장 발전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1948년 이 회장이 서울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때는 조홍제 회장이 동참하여 1962년 독립할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허만정 선생은 또 1948년 구인회 회장이 부산에서 락희화학을 창업할 때 사업자금을 보태고 3남 허준구 회장을 사업에 동참시켰습니다.

락희는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의 공동 사업으로 처음 출발할 때 두 집안의 지분은 구씨 가문 몫이 60프로, 허씨 가문 몫은 40프로였다고 합니다. 두 가문은 서로 초심을 잃지 않고 신의를 잘 지켜 60년 가까이 화목하게 공존하다 2005년에 LG와 GS로 분리 독립했습니다. 

그룹을 분리할 때도 불협화음 하나 없이 잘 마무리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두 그룹이 서로 도와가며 화목하게 공존하니 재산 때문에 형제자매 간에도 서로 등 돌리고 미워하는 일이 허다한 오늘의 세태에 비춰 정말 귀하고 귀감이 되는 모습입니다. 

앞서 언급했 듯이 두 가문의 뿌리가 있는 승산마을에는 화목하고 평화로운 산천의 정기가 가득 넘칩니다. 두 가문이 미담으로 많은 감동을 준 데에는 승산마을의 좋은 기운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