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순 Global Watch] 러시아 우크라이나 협상과 대만, 불쾌한 진실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미국 권력서열 3위의 대만 방문에 중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올해 2월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언어는 허공 중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실제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의 맥락 속에 놓여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언어들은 누군가에게 읽혀야만 하며, 해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맥락’(context)을 ‘잠재된 독자’라고 부르는데 이 독자들은 익명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대상은 아니며 늘 역사적이고 특수하다.

이론의 경우에는, 언뜻 보기에는 난해하지만, 실은 이 같은 언어의 성격을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8세기 프랑스 역사를 언급하면서,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가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명제를 뒤집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출세작(프랑스 아카데미 현상 논문 수상작이다)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핵심 요지다. 루소는 인간들은 자연 상태 하에서는 서로 평등하고 평화로웠지만, 잘못된 제도(당시 조건으로서는 봉건제)로 인해 불평등해지고 주인-노예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인간들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이 같은 문제들은 모두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야말로 이 같은 ‘자연회귀’의 수단이자 완성태라고 주장했다.

푸코는 이같은 루소 주장이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의 개념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홉스는 인간들은 원래 불평등하며(그는 만일 인간들이 서로 평등하다면 민주주의에 합의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불평등은 사회를 지배-복종 상태로 만들며 여기에서 야기되는 항구적 적대 상태(영구전쟁)를 해소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라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한다.

즉 홉스의 관점에서는 민주주의는 노예가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주인들이 보다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상호간의 계약이며, 처음부터 불평등한 것이었다.

누가 옳으냐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론사의 관점에서는 위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이론이 노골적으로 그것을 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어떤 기존의 이론을 논적으로 하느냐, 그리고 그 같은 주장은 어떤 독자들(정치적 주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느냐를 찾는 것은 핵심적이고 그 사례도 매우 풍부하다.

푸코는 다른 질문도 던지는데, 전쟁론의 아버지인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인 “전쟁은 정치의 다른 수단”이 어떤 명제를 뒤집은 것인가를 묻는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의 전쟁관을 이론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정세 하에서는 나폴레옹은 보편적 ‘해방자’였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

“정치는 전쟁의 다른 수단”이 될 것이다. 즉, 말로 하는 투쟁(정치)은 실제로는 살륙(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또는 전쟁이 실행되는 다른 수단/공간일 뿐이다.

이는 정치(사회의 내부 관계)가 실은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적대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며 항구적인 내전 상태를, 그리고 그 같은 내전 상태만이 사회를 유지해준다는 것을 뜻한다.

클라우제비츠가 뒤집은 것은 바로 이같은 기존의 정치/전쟁관(영구 내전)이었다. 그는 단지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외화’했다. 즉, 내전을 국제전으로 치환했다.

흥미롭게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848년 프랑스 6월 혁명 뒤 대통령이 되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 시기의 프랑스의 대외 정책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에 아주 잘 부합한다.

현실에서의 언어는 종종 더 어렵다. 현실의 정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더 다층적인 주체들로 나뉘어져 있고, 한편으로는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언어인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특수한 (의식하든 못하든 잠재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자신들만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한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2015년 그리스 부채 위기가 한창일 때, 이탈리아의 어느 정치인이 유로존의 단결을 호소하면서 “만일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이탈한다면) 그것은 유럽 전체의 내전으로 번질 것이며 3차 세계대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를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작 그리스가 이탈한다고 해서, 그 파급력이 최대한 EU의 해체를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이 왜 3차 대전이 되지?

의문은 아주 나중에야 풀렸다. 바로우파키스 당시 그리스 재무장관이 훗날 “러시아가 지원해주었다면 그리스는 유로화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당시 그리스는 유로화를 대체할 새로운 통화-드라크마-를 찍어낼 돈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를 포기했다. 그 시기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민스크 조약을 성사시켰는데, 아마도 그리스를 포기하는 대가였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EU가 해체된다면, 왜 3차 대전이 될까? EU는 유럽 자본가들의 이상향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서 제국을 건설했다(또는 하고 싶어한다). 만일 EU가 해체된다면, 유럽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대 상태-유럽의 영토분쟁, 민족문제, 자원 문제를 고려했을 때-는 불가피할 것이다.

유럽이 전면적인 civil war에 돌입한다면 그것이 지난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마친가지로 3차 대전이 될까? 그건 아마도 인도 대외담당장관이 제대로 핵심을 찔렀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이 세계 전체의 문제인줄 안다”.

어떤 정치적 언어들은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건 갈수록 정치의 수준이 낮아져서 그렇다.

지난 6월 중순 G7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에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일말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협상을 위해서는) 러시아는 제스처(gesture)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러시아가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뉴스는 소리소문 없이 묻혀졌는데, 그로부터 2주 쯤 뒤에 러시아가 흑해의 그 시끄러운 ‘스네이크 아일랜드’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아주 흥미로운 성명서를 내놓았다. 러시아는 ‘선의의 제스처’(gesture of the good will)로 이 섬에서 나간다는 것이다. 마크롱의 ‘제스쳐’에 대한 화답인 것이다.

그래서 이미 이 시기부터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스네이크 아일랜드를 포기하는 것은 러시아가 오데사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다. 러시아는 우리는 이만큼 양보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직후인 6월 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작전 목표는 루한스크공화국과 도네츠크공화국의 안전을 보호하고 러시아의 안보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고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거론했다.

즉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점령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국가 원수가 확증해준 것이다. 다만 자포르지에와 헤르손 지역으로의 진출은 러시아의 영토(크림반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buffer zone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의 평화협상 제안의 대략적인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그 대가로(즉 러시아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러시아는 무엇을 얻었을까? 대략 기본적인 골격은 나왔다. 부분적으로 대러시아 제재를 해제하는 것이다(곡물 수출 재개와 러시아 석유 금수 조치 연기).
 
[이공순 Global Watch] 러시아 우크라이나 협상과 대만, 불쾌한 진실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협상에서 곡물은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밀밭. <연합뉴스>

그러면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을까? 현재까지 나온 사인들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곡물 수출 재개는 타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직접 나서서 “러시아 곡물 수출을 금지한 것은 아니니까 보험사들은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옐런은 곡물 수출 운행 수단으로 ‘ship’만을 언급했다. 그런데 통상 곡물은 ‘cargo’로 운반된다. Ship은 일반적인 화물선을 지칭하고 cargo는 곡물, 원자재등을 나르는 바지선을 뜻한다.

그러니까 말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세부 내역을 따지고 들어가면 여전히 금수 대상에 포함된다(엄격히 말하면 회색지대다). 그래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곡물은 그다지 중요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곡물을 수출하지 않으면 세계가 기아에 시달릴 것이라는 위협이 난무하는데도?

그렇다. 현재 세계 곡물 작황이나 재고 현황을 보면 곡물은 부족 상태가 아니다. 게다가 올해 미국과 캐나다, 러시아의 곡물은 유례없는 풍작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제 곡물 가격도 잠시 급등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면 제3세계의 곡물 부족 현상은? 스리랑카는 그 문제로 정권이 붕괴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곡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돈’이, 즉 달러가 없어서 제3세계 국가들이 곡물을 사들이지 못하는 있는 것뿐이다. 돈이 없어서 굶는 것이지, 쌀이 없어서 굶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재개는 실은 글로벌 식량 문제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은 크게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밀, 옥수수, 해바라기 씨앗.

옥수수와 해바라기 씨앗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냐면, 얼마전 바이든 정권은 디젤 혼합유(미국은 환경 규제를 명분으로 연료용 디젤유에 옥수수 추출 기름을 반드시 섞도록 되어 있다) 규정을 연장했다. 미국산 옥수수의 절반은 이 혼합유 원료로 쓰인다.

식량원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밀뿐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전세계 곡물 수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5-6% 정도다. 우크라이나는 전체 밀 생산량 가운데 절반가량은 국내 소비용으로 나머지 절반은 수출용으로 쓰고 있다.

전쟁 이전인 올 초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약 2300만 톤의 밀 재고가 있었다. 그리고 전쟁 과정 중에 약 1천만 톤을 수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육로를 통해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경유).

그러면 나머지가 국제 시장에 나올까? 국내 소비도 감안해야 한다. 즉,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수출할 물량이 거의 없다. 그러니 우크라이나발 곡물 수출은 그냥 말에 불과하다.

올해 수확된 곡물로 국제 식량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밀 생산 지역은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돈바스 지역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중부 이북 지방은 옥수수 주생산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틀 전에 올해 우크라이나 밀 생산량이 절반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당연하다. 다 돈바스 지역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농사를 위한 비료도 기름도 턱없이 부족하다. 전쟁 뒤 인구의 약 1/4 이상이 해외로 탈출(난민화)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밀 생산량 가운데 수출가능 분량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마치 우크라이나가 글로벌 식량 위기 해결의 구세주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지나치게 제 정신이 아니다.

러시아산 밀이 국제 곡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2% 정도다. 따라서 러시아산 곡물 수출이 막히면 이 때는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

미국이 이를 풀어줄까? 미국산 밀이 풍작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격 상승이 이루어지는 정도 선에서만 풀어줄 것이다. 비싸지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없는 것은 아니다. 달러가 없을 뿐이다.

물론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내년에는 정말 글로벌 식량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회피할 방도도 존재한다(제재만 해제하면 즉시로 해결된다. 동시에 달러를 식량난에 허덕이는 최빈국에 공급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식량’ 자체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식량과 관련된’ 것들이 위기의 원인이지 식량은 위기가 아니다.

이는 현재의 ‘식량 위기’ 소동이 다른 것을 은폐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011년 아랍의 봄이 그랬듯이, 글로벌 달러 공급 부족 현상을 덮는 정치적 효과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떨까? 글로벌 가격은 지난 2008년이나, 심지어는 지난 2014년 수준에도 못 미친다. 가만 생각하면 소비자 유가가 이렇게 오를 이유가 없다. 시장은 공급 과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급난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유가가 오르는가? 미국의 경우에는 지난 10여년간의 정유업체의 투자 부족으로 설비용량(capacity)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일단 공급이 감소하면, 수요-공급 곡선이 비탄력적인 필수재 시장은 seller’s market(판매자가 지배하는 시장)이 된다. 부르는 게 값이다. 코로나19를 전후한 서구 유통망의 훼손은 이들 지역에서 seller’s market 현상을 야기했다. 기업들은 적게 팔아도 이윤은 예전보다 증가하는데 굳이 생산을 늘릴 이유도 없다.

물론 이 같은 시장의 전제 조건은 독과점 시장이라는 것이다(특히 카르텔이 존재하는 업종). 따라서 이는 ‘구조적’인 문제다. 경기 순환적인, 따라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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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은행은 경기적인 인플레이션이든 구조적 인플레이션이든 경기적 수단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은 퇴임 뒤 중앙은행 정책의 98%는 말로 이뤄진다고 털어놓았다. 

‘경기’ 문제가 아닌데, 중앙은행이 가진 수단은, 그리고 그들의 이론은 ‘경기적’인 것뿐이다. 현상은 경기적인 인플레이션이든, 구조적 인플레이션이든 동일한 ‘인플레이션’이기는 하지만, 원인은 다르며 따라서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이른바 ‘위임 사무’(mandate)를 핑계로, 원인이 무엇이든 동일한 처방을 내린다. 말하자면, 중앙은행의 정책은 석기시대 샤먼과 별 차이가 없다. 병명이 무엇이든 기도하고 굿 판을 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다. 하다하다 안 되서 환자가 죽으면 신심이 부족한 탓이고(이를 현대에서는 고급스러운 용어로 credibility라고 한다), 어찌어찌 살아나면 그건 중앙은행 덕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중앙은행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을 주는 일이다. 왜 그린스펀이 성공했는가?(실은 말아먹었지만) 그것은 그가 ‘마에스트로’(거장)였기 때문이다. 정작 언론은 캐보지 않았다. 그가 어떤 부문에서 마에스트로였는지. 그는 언어의 마에스트로였다.

그러나 그가 마에스트로가 된 것은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그걸 금과옥조로 만들어 주는 월가 덕분이었다. 그가 개 짖는 소리를 냈더라도 월가는 이를 신의 신음이라고 치장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재임기는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며, 그 시장의 중심에는 글로벌 메이저 뱅크들(이들이 연준의 프라이머리 딜러들이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자인 버냉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아마도 부러워한 것 같다. 그는 퇴임 후에 “중앙은행 정책의 98%는 ‘말’로 이루어진다”고 털어놓기도 했다(즉 중앙은행은 금리 정책은 별 힘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버냉키는 그린스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발언이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고, 대신에 집단적인 공식 성명, 이른바 ‘forward guidance’(선도 지침)이 그 같은 영향력을 가졌다.

버냉키가 퇴임 후에 한 얘기들은 좀 곱씹어 볼 필요가 있기는 하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한 끼에 25만 달러짜리 점심 사례로 투자자들에게 슬쩍슬쩍 흘린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생전에는 다시 예전의 금리(대략 3%대)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그러니까 우리는 영영 제로 금리를 못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 기사를 보고 필자는 이 양반이 요절할 요량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지금 기사 쓰면서 다시 확인해 봤는데 아직 부고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인플레이션 얘기는 이쯤 하자. 이 문제는 다음 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을 잡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인플레이션 경험을 우려하며 이른바 ‘lean against wind’(인플레이션이 구조화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금리로 이를 저지하는 정책)를 내세운 BIS(국제결제은행)의 논리를 집중 검토하고자 한다(한국은행 통화정책국장의 금리 인상 옹호론도 같은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 이론은 지난 2014년 연준의 제레미 스타인 이사가 QE(양적완화)를 반대하며 주장한 것이다. 원래 중앙은행 기본 논리 중의 하나다).

그러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안 보이는, 또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 물밑 협상은 잘 되고 있을까? 아니다. 도처에서 파열음이 너무 많이 나서 자신을 할 수가 없다. 제스처는 도처에서 오가는데, 서로 사못지 아니한다.

일단 대략적인 그림부터 확인해 보자. 그 누구도 서로간에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의 발언이 제일 신빙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친러시아 성향일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도 위기가 고조될 경우 직접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동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지 않은 국가다).

부치치는 지난 7월 중순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 공세가 마무리되는 8월 말 쯤에 평화안을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지옥 문이 열린다”고 말했다.

아마도 공식적인 평화 협상은 8월 말이나 9월 초쯤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평화안은 푸틴의 발언을 빌자면, “러시아가 요구하는 내용으로” 될 것이다. 이 점에서는 러시아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즉 러시아에게는 평화의 대가는 돈바스 지역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젤렌스키의 발언은 다르다. 그는 자신들이 ‘승리한 상태에서만’ 협상을 할 것이며, 그 시기는 12월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우크라이나가 무슨 새로운 무기를 받아오든 전황은 변하지 않는다. 나토가 전면 개입하지 않는 한은 전세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나토는 개입하지 않는다. 또는 개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수많은 시뮬레이션(war game)에서 단 한 번도 예외없이 러시아와 나토의 충돌은 핵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핵전쟁을 하면 현재 상태에서는 나토가 승리한다. 그런데 이 승리는 남는 것이 없는 승리다. 전쟁은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무력 행사지 자신도 목숨줄만 위태로워지는 파괴가 목적은 아니다.

이마저도 올해 12월 러시아가 신형 전략 핵무기인 sarmatII를 실전 배치하면 장담할 수 없다(러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핵무기의 사정거리는 3만 6천 킬로미터로 남극을 돌아 미국 본토 한복판을 타격할 수 있다. 현재의 방어체제로는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올해 1월5일 미러중영프가 공동으로 핵무기 불사용 성명을 내놓았을 때, 나토의 불개입은 이미 확정된 상태였다(동시에 전쟁도 확정된 상태였다. 다만 그 전쟁이 어느 규모일지만 미정이었다).

나토가 없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원하는대로 할 수밖에 없다. 푸틴이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말한 것은 농담이 아니다. 러시아는 정말로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푸틴이 이 발언을 한 것은 우크라이나(그리고 나토)가 8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크라이나는 이 공세가 최소한 ‘정치적으로’, 즉 프로파간다에 있어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승리’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뭔가 러시아가 손실을 보아야 한다. 또는 그럴듯한 그림이라도 그려줘야 한다.

러시아는 그럴 용의가 없다. 기껏해야 지금 정도의 우크라이나의 성공을 용인할 따름인 듯 보인다(HIMARS를 통한 일부 시설의 파괴). 이는 며칠 전의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지난 주말 우크라이나 포로(Azov Battalion)들이 수용되어 있는 포로수용소가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포로들에 대한 고문을 은폐하기 위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자신만만하다. 유엔과 적십자사의 공동 조사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당연히 자신만만할만 하다.

필자도 폭격 당시 영상을 봤는데 폭격 직후 도처에서 HIMARS 유도탄 잔해가 굴러다니는 것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는 Azov 포로들은 ‘자산’이다. 그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자백을 받아내서 법정에 세우는 것은 러시아에게는 선전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다.

동기로 본다면, 러시아가 포로들을 죽일 이유가 없다. 우크라이나는 동기가 넘친다. 진짜로 흥미로운 부분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미국의 블링컨 국무장관이 공개적으로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에게 회담을 요청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양국 간의 범죄인 교환이다(미국은 러시아 무기 밀매상, 러시아는 마약 혐의로 미국인 농구 선수를 수감 중이다). 그런데 이는 외교적으로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런 류의 교환 협상은 비공개로 진행되며, 장관급이 나설 문제도 아니다.

라브로프 장관은 점잖게 “이런 건 비공개로 하는거다. 전화는 시간 나면 고려해 보겠다”고 배짱을 튕겼다. 이게 전쟁 150일 만에 고작 두 번째 전화 대화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HIMARS는 미군의 정보와 통제 하에 있다. 즉, 포로 수용소 폭격은 미군이 지시했다는 뜻이다(우크라이나가 한 것이라곤 고작 방아쇠를 당긴 것 뿐이다).

러시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며, 모든 정황이 미국측에 불리하다. 오죽하면 미 국방부가 이 폭격 사건을 두고 ‘실수인 듯하다”고 애매하게 둘러댈 정도다. 블링컨의 대화 요청은 일종의 damage control이다.

진짜 실수였는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의사 표명을 하는 통로를 갖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협상력은 러시아가 우위에 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나 나토가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수용할리도 없다. 그러니 협상은 난항이다.

서구가 쓸 수 있는 무기, 즉 경제제재는 이미 거의 밑천이 드러났다.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자살골에 불과하며, 더 이상 쓸 수 있는 제재도 거의 남지 않았다.

남은 거라곤 이른바 러시아산 원유의 차별 가격제(러시아산 원유에 가격 제한을 두어 국제 유통을 제한하는 것)뿐인데, 그 시점이 옐렌 미국 재무장관 말에 따르면, 12월 초다. 즉 스케쥴상 젤렌스키의 발언과 일치한다.

문제는 원유 가격 제한제가 기술적으로 실제 시행하는데 매우 어렵다는데 있다. 그리고 실은 굳이 그렇게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이슈가 처음 거론되었을 때, 러시아 국영석유회사(로즈네프트) CEO가 흥미로운 발언을 했었는데, “러시아는 원가 이하로는 판매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러시아의 원유 생산 원가는 매우 낮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부 주장에 따르면 배럴당 20달러 이하다(사우디아라비아는 약 8달러 이하로 알려져 있다). 이 발언이 나왔을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가 넘었었다. 무려 80달러 차이가 난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러시아 원유 가격 제한폭이 약 50달러 선이라고 루머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왜 원가 이하를 말하지?

어차피 글로벌 유가는 하락하게 되어 있다. 공급 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수요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특히 유럽이 천연가스 부족으로 제조업 생산을 감축하고(유럽의 화학산업은 거의 가동 불능 상태에 들어가고 물류도 마비될 것이다), 가계 소비가 감소하면 원유는 곧 공급과잉 상태가 된다.

그래서 말인데, 실은 중앙은행들은 굳이 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 식량도 문제가 없고, 원유도 문제가 없다. 물가는 빠르게 하락할 것이다.

만일, 중앙은행들이 앞으로도 더 금리를 올린다면 그것은 ‘물가’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어디선가 파생상품이 폭발 직전에 있다거나, 또는 전쟁을 더 지속/강화하려고 한다거나, 또는 중앙은행 이론가들이 완전히 멍텅구리거나.
 
[이공순 Global Watch] 러시아 우크라이나 협상과 대만, 불쾌한 진실들

▲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대만 방문은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중국이 나온다. 러시아만을 상대로 해서는 더 이상의 인플레이션은 가능하지 않다.

푸틴이 지난달 초에 재미있는 얘기를 했는데, 왜 나토가 러시아를 전쟁 상대로 골랐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란은 너무 작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서구는 전쟁을 필요로 하는데, 이란 정도로는 충분한 폭발력이 없다. 러시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로도 모자라면(이건 제재가 실패한 영향이 크다), 더 큰 상대를 건드려야 한다. 그래서 펠로시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이건 어제오늘 계획된 일은 아니다. 2019년에 이미 입안되었으며, 바이든 정권은 이를 위한 ‘원 포인틀 릴리프”라고 할 수 있다.
전략 연구소인 Strategic Culture Foundation의 7월30일자 리포트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설리번이 원했던 진주만 모멘트인가?” 중에서.

“2019년 10월, 훗날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제이크 설리번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세계를 한데 묶고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명백한 위협이 필요하며, 중국은 이 같은 미국의 대외 정책 원칙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미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대중들이 중국이 지구적 위협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며, 중국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미국은 진주만 모멘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 진주만 모멘트는 대중들의 마음을 바꾸고는 사건이 될 것이며,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것이다라고 그는 봤다. 그는 공격적인 PR과 언론의 사회적 조절을 통해 이 같은 미국의 위선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지칭하여 미국 예외주의는 구제/갱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개전 초기의 천지를 뒤덮는 프로파간다의 향연은 설리번의 이 같은 발언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 방문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 이란으로도 안 되어서 러시아를 들고 나왔고, 그걸로도 안 되어서 중국을 들고 나오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특히 군용기를 이용한다면, 명백한 도발이다. 왜냐하면 국제법상 중국은 대만을 포함하는 중국 대륙 전체의 유일한 합법 국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도 문서로는 이를 인정하고 있다(이것이 미-중 수교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저격하여 펄하버 모멘트를 만들 것인가? 미국의 미끼를 물 것인가? 그럴리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전에 먼저 펠로시가 대만을 방문할 리가 없다.

펠로시의 경력이나 행동을 보면, 미국은 고사하고 인류, 지구를 다 팔아먹더라도 자기 목숨이 더 소중한 사람이다(사실 대부분 그렇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데 대만을 방문할리가 없는 인물이다. 즉 역설적으로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간다고 했을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엄청난 모욕인데, 충분히 참을 수 있는 모욕이다. 이미 2천년 전에 한신이 불량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진핑이 바이든과의 전화 회담에서 했다는 얘기가 시사적인데, “불장난하면 불에 타 죽는다”는 말은 자신들이 직접 손을 쓴다는 뜻이 아니다. 자멸할 것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너희들은 애들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아직은 미국에 반격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중국의 스케쥴에 따르면 2025년 이후에야 비로소 방어적 반격에 나선다).

만일 미국이 진지하게 ‘가공된 위협을 통한’ 미국 패권주의의 재구성을 원한다면, 그 결과로 동시에 그 수단 중의 하나로 인플레이션률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앙은행 기준 금리도 자동적으로 더 높아질 것이다(경제가 어떻든 간에).

이건 전시경제다. 따라서 현재 상태로는 적어도 11월 중간선거 이전까지는, 또는 그 이후에도 금리가 시장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지난 월요일자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전 뉴욕연준 총재 빌 더들리는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금리 인상을 경고한 바 있다(이 사람은 골드만삭스 출신이라 발언을 무겁게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훈. 언어들은 들리는 것과는 다르다. 정의와 자유, 평등과 같은 우아한 수사를 제하고 나면, 우리들의 언어에 남는 것은 살륙과 도륙과 권력욕뿐이다. 정치는 그리고 정치적 언어들은 전쟁의 다른 수단이며, 진실은 늘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쾌한 덩어리들이다. 홉스가 옳았다. 이공순 저널리스트